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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9 (수)

“밤새 산에서 별빛달빛 받아 사진 찍으며 ‘시 공부’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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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지리산 바이커’ 이원규 시인

한겨레

“4대강 순례와 탁발 순례, 삼보일배, 오체투지 등을 하면서 몸이 아주 안 좋아졌어요. 병원에 갔더니 폐암 말기라기에 조용히 사라지려 했는데, 아내의 권유로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니 결핵성 늑막염이었어요. 약을 챙겨 먹으면서 한편으로 전국 오지의 야생화를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강과 땅을 지키자고 국토순례를 하면서도 작은 꽃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주지 못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렇게 1년 남짓 꽃을 찾아 다니다 보니 건강도 좋아졌지요.”

‘지리산 바이커’ 이원규 시인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용건은 크게 셋. 인사동 마루 갤러리에서 26일 개막해 새달 2일까지 열리는 사진전 <별나무>와 신작 시집 <달빛을 깨물다>(천년의시작)와 시사진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역락) 출판기념회다. 25일 오후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작년이 지리산으로 들어온 지 20년 되는 해였는데 그냥 지나갔다. 어떤 식으로든 한번은 털고 가야 할 것 같아 시집을 내고 사진전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지리산 살이 20년’ 첫 서울 사진전
새달 2일까지 인사동 ‘별나무’ 전시
시집·시사진집 출판기념회도 함께


“국토순례했지만 풀꽃 이름은 몰라”
‘폐암 오진’ 겪고 오지 야생화 찍기
‘순례기·사진 노하우’ 산문집도 준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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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사진전은 2015년 전남 여수에서 연 야생화전 <몽유운무화>(夢遊雲霧花). 제목처럼 구름과 안개에 싸인 야생화를 포착한 이 사진전은 그 뒤 대구, 울산, 하동으로 이어졌다. 사진 작업이 어언 10여년에 이르지만, 서울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야생화 사진 작업을 7~8년 정도 했을무렵 그가 잡은 두번째 주제가 ‘별나무’다. 밤하늘 가득한 별무리와 산속 나무를 함께 찍는 것. 벚나무와 목련, 철쭉 등 꽃 핀 나무들과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가 달빛을 받아 환하게 웃기도 하고 은하수가 나뭇가지 사이를 흘러가기도 한다.

야생화든 별나무든 사진 작업이 수월하지는 않기는 마찬가지. 햇볕 아래가 아닌 구름과 안개 속의 꽃을 찍기 위해 길게는 며칠씩 습기 찬 산 속에서 지내다 보니 ‘습병’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별빛의 양명한 기운을 받겠노라며 별나무 시리즈로 방향을 틀었지만, 낮밤이 바뀌는 불규칙한 생활이 됐다. 밤을 꼬박 새우며 몇 시간씩 기다렸다가 원하던 한 컷을 건지면 그나마 다행. 꽃 피는 시기와 달빛의 밝기, 은하수의 위치 등이 두루 맞아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한 나무를 3년에서 5년에 걸쳐 찍어야 겨우 한 번 성공하는 게 보통이었다. 해를 걸러 열매를 맺는 야생 감나무는 한 번 실패하면 두 해를 기다려야 했다.

“제가 워낙 독학으로 사진을 배운 터라, 별나무 사진 찍으면서도 어려움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시중에 나와 있는 사진 교본을 참조했는데, 책들도 잘못된 게 많더군요. 별을 잡으려 하면 꽃이 뭉개지고, 꽃에 초점을 맞추면 별이 흐릿해지고….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제 나름으로 촬영법을 익혔어요. 내년에 낼 산문집에 순례 얘기와 함께 야생화와 별나무 찍은 얘기도 넣으려고 합니다.”

꽃과 별과 나무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서 그의 시도 발아하고 숙성했다. “사진에 미치면 시를 못 쓴다는 경계의 말을 워낙 많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야생화와 별나무를 찍으면서 오히려 시 공부가 더 됐습니다. 사진을 찍자면 하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을 기다려야 하니까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요. 아무도 없는 산 속의 밤이 얼마나 깁니까? 살아온 날들을 복기하기에 정말 좋더군요. 어릴 때 기억, 시에 대한 생각들, 이런 걸 산 속에서 메모해 두고 그 걸 정리한 게 이번 두 시집에 실린 시들입니다. 가만히 집에 앉아 쓴 시는 하나도 없어요.”

시집 <달빛을 깨물다>에 실린 작품 ‘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가 특히 인상적이다. 겨울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기 위한 불쏘시개로 신문을 쓰다가 그것으로 부족하자 문예지를 찢어서 태우는 이야기를 그렸다.

“표지는 뻣뻣하고 목차는 미끄러워/ 문화예술의 연기인지 그을음인지/ 과묵한 창작은 쉬쉬 거품을 내뿜지 않는다/ 재생 속지의 보드라운 수필을 훑어보다/ 엄살 심한 문장을 찢어 아궁이에 넣으니/ 글자들끼리 서로 간질이며 타오르고/ 때로 쉬운 것이 더 어려운 비평의 요지는/ 같은 대학 다녔어요 술친구예요/ 후배인지 제자인지 나랑 사귈까요/ 활발발 문맥의 얼굴 비비며 불타오른다(…)”

이런 서술 뒤에 “숲만 무성한 소설” “불통의 시” 등을 태우는 장면이 이어진다. 문예지로 상징되는 문학 현실에 매우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요즘 문학은 너무 문학판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 같다. 독자가 시를 외면한 게 아니라 시인들이 독자를 외면한 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정말로 온몸으로 쓴 시”라 높이 평가하는 작품들이 있다. <달빛을 깨물다>에 ‘일생 단 한 편의 시’라는 부제를 단 연작 열여섯 편으로 소개한 그것이다. 처음 한글을 배운 할머니가 백일장에 나와 쓴 시 가운데 “턱하니 연필 지팡이를 짚고 보이/ 허이구메, 놀래 자빠지겄다!/ 병원 간판 부산 가는 버스도 이래 다 보이고/ 온 시상이 확 달라졌다 아이가?”라는 표현,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쓴 시 “송아지의 눈은 크고 맑고 슬프다/ 그런데 소고기 국물은 맛있다/ 난 어떡하지?” 같은 시를 보며 그는 스스로도 크게 반성한다고 했다.

“시골 어머니·아버지 세대들이 ‘신인류’와 경계에 있는 마지막 인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도 그렇고 도구도 그렇구요. 이분들 몸에 밴 지혜, 언어의 지혜를 잘 받아 적는 게 시인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별빛을 사진으로 받아 적는 마음으로, 이분들 말씀처럼 짧고 쉬우면서도 삶의 본질에 육박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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