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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원희복의 인물탐구]방송작가유니온 위원장 이미지 "방송은 봉준호 감독 보도할 자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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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사실이 화제가 됐다. 노동권을 지키며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다. 방송사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지만 정작 방송제작에서 표준근로계약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사실 영화계는 좀 나은 편이다. 표준근로계약서가 법적으로 의무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계는 권고사항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 공영방송조차 표준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게다가 7월 1일부터 특례업종으로 유예됐던 방송사 주 52시간 근로가 적용된다. 방송사 정규직 기자·PD가 주 52시간을 지킨다고 퇴근하면 작가들이 야근으로 메워야 한다. 방송작가들이 ‘죽어 나가기’ 일보직전 상황에 몰려 있는 것이다. 6월 7일 방송작가 노동조합인 ‘방송작가 유니온’ 이미지 위원장(42)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 지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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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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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도 안 쓰는 표준근로계약서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여건은 영화계보다 훨씬 열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수상했을 때 별도 성명서를 냈다. 성명의 요지는 무엇인가.

“유관단체 중 우리 방송작가 유니온이 가장 먼저 성명을 발표했다. 그동안 방송사는 표준근로계약과 노동시간 준수가 제작비를 높여 적자를 낳고 양질의 영상 콘텐츠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노사 간 계약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해도 한국 영상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정당한 근로계약을 회피하고 노사협상조차 거부하는 방송사들이 칸 영화제 소식을 전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방송작가 유니온 조합원은 어떤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완벽하게 창의성을 가진 작가에서 극심한 노동자성에 가까운 작가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노조다. 흔히 김수현 선생 같은 드라마 작가만 있는 줄 아는데 아니다.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JTBC 뉴스룸>도 매우 많은 작가가 투입돼 기자·PD와 함께 만든다. 여성 출연자의 옷을 들고 다니는 코디는 연예인 옷을 들고 다닌다며 좋아서 시작하지만 대부분 일주일을 못버틴다. 방송 프로그램은 다양한 비정규직 여성의 노력이 모아져 만들어진다. 심하게 말하면 ‘방송은 20~30대 여성 노동권을 갈아서 만든다’고 할 정도다.”

-발표한 성명서에는 영화계에 10년 전 도입한 근로계약서를 방송계에도 도입하자고 했다.

“영화계는 10년 전부터 노조가 결성돼 있고, 영화발전기금이 들어가는 영화는 반드시 근로계약서를 쓰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계는 권고사항일 뿐이다. KBS와 같이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방송사조차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작가와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하지는 않는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것을 방송작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금은 PD 개인이 방송작가를 고용하는 형태로 돼 있다.

“인사이동으로 다른 PD가 와 ‘나는 다른 작가와 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현직 작가는 일자리를 잃는다. PD는 언제든지 작가를 채용·해고할 수 있는 것이 연출권이라고 주장한다. 드라마는 PD가 특정 작가와 일하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프로그램에 그런 방식이 적용되는 것은 문제다. 계약서를 쓰더라도 ‘방송사의 사정으로 계약이 종료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PD의 연출권이 중요하더라도 생계문제가 달린 노동자의 노동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 노동청에 항의하면 ‘방송작가는 근로자가 아니다’라고 접수조차 거절한다.”

<PD수첩>이나 <시사매거진 2580> <시사기획 창> 등 사회 고발성이 큰 시사 프로그램에는 많은 작가가 투입된다. 이들 시사 프로그램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많이 다뤘다. 그러나 정작 방송제작에 투입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뤘던 시사 프로그램은 본 적이 없다. 가장 어두운 곳이 바로 등잔 밑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현재 방송사 중 근로계약서를 쓰는 곳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TBS(교통방송)가 유일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방송작가 유니온 조합원 400여명 중에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하는 작가는 TBS에서 일하는 20여명 정도뿐이다.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니 4대 보험은 물론 최저임금이나 시간외수당 등 여타 노동조건 문제도 풀리지 않는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들어 방송사 사장들의 ‘용단’으로 KBS, MBC, JTBC, tvN, TBS 정도가 신입 작가들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공중파 방송사의 시청률 하락과 큰 폭의 적자는 방송작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유력 프로그램에서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작가를 바꾸는 경우도 많다”면서 “종편 등장으로 시청률을 나눠먹는 방송환경의 변화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작가만 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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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방송작가 유니온 위원장이 방송작가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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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과 밤샘 노동 다반사

방송작가의 노동강도도 고되다. 방송작가 유니온이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5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년 방송작가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충격적이다. 전체 응답자의 93.4%(542명)가 프리랜서지만 72.4%(420명)가 출퇴근하는 상근 형태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에서 52시간 사이 28.6%(166명) △52시간에서 68시간 사이 26.4%(153명) △15시간에서 40시간 사이 25.7%(149명)로 나타났다. 68시간 이상 일한다는 응답자도 7.9%(46명)로 집계됐다.

장시간 노동과 밤샘이 다반사인 것이다. 설문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복수 응답) △당연시하는 업계 분위기 76.9% △빠듯한 제작 일정 65.2% △근로기준법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고용형태 60.5%로 나타났다. ‘연예인 스케줄에 맞추느라’ 등의 의견도 나왔다. 황당한 근무사례를 보면 ‘119가 올 때까지 일했고 응급실에서 자막을 뽑았다’ ‘상복을 입은 채로 장례식장에서 대본을 썼다’는 얘기도 있다.

이 위원장은 “나도 새벽 1시30분에 출산하고 전신마취가 깨어나자마자 3시에 다시 원고를 썼다”면서 “만삭의 여자 PD가 면접을 보면서 ‘결혼했느냐, 임신계획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임신계획이 있는 작가는 쓰지 않겠다’고 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니 방송작가들이 결혼·출산을 주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정부 아이돌봄서비스를 신청하려면 맞벌이부부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프리랜서라 못한다”고 말했다.

당장 7월 1일부터 방송사에도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 적용된다. 정규직 기자·PD는 이에 적용받지만 그 후유증은 프리랜서인 작가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대본이 완성되면 방송사 법무팀에서 체크하는 절차가 있다. 과거에는 밤 10시가 넘어도 작가가 원고를 넘겨주면 법무팀이 기다렸다가 검토해 줬다. 그러나 이제 법무팀은 ‘땡’ 하면 퇴근한다. 결국 촬영날짜를 맞추기 위해 작가는 시간에 더 쫓길 수밖에 없다. 이 위원장은 “주 52시간 노동이 시행되면 방송작가 노동의 질이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방송작가 유니온(http://www.writers union.kr)은 열악한 방송작가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 2017년 11월 11일 출범했다. 방송작가라면 장르·연차·지역에 관계없이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다. 고용안정·노동권 보장 등을 위해 단체협약을 통한 표준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한다. 임금체불·계약위반 등 각종 위법사례에 대한 법률상담도 지원한다. 이 위원장은 “대구MBC와 단체교섭 사례가 있고, KBS에는 곧 단체교섭을 정식 요청하려고 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지역 MBC 작가들이 어렵게 합의한 단체협약에 MBC 본사가 법률검토를 이유로 제동을 거는 등 사장이 ‘비교적’ 개혁적 인물로 바뀌었음에도 불공정 노동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고수입 유명 작가들은 대부분 비조합원”

이 위원장은 초대 노조위원장이다. 그러나 그는 “나는 노조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조를 만들기 위해 몇 년간 애썼다. 어렵게 노조를 만들었지만 정작 위원장을 누가 하느냐로 고민에 빠졌다. 이 위원장은 “노조위원장은 곧 방송사로부터 ‘낙인’이 찍히는 길”이라며 “TBS가 노조위원장이라는 이유로 해고될 확률이 가장 적다는 이유로 내가 위원장이 됐다(웃음)”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1977년 대구 출신으로 서울대 소비자학과 97학번이다. MBC 방송작가 과정을 마치고 2003년부터 방송작가를 시작했다. MBC <PD수첩>에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오래 취재했다. 2014년 TBS로 옮겨 <퇴근길 이철희입니다>를 시작했고,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거쳐 현재 <TV민생연구소> 메인 작가로 일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방송작가 문제는 다루지 못했다.

방송작가는 보통 신입 작가-서브 작가-메인 작가 단계를 거친다. 작가의 수입은 최저임금도 못받는 신입 작가에서 연간 수억 원을 버는 유명 작가 등 천차만별이다. 이 위원장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는 작가분들은 대부분 조합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방송은 물론 영화·연극·뮤지컬·유튜브 등 모든 콘텐츠의 기초는 바로 대본 즉 글이다. 아무리 최첨단 영상장비를 동원하든, 출연료가 비싼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든, 유능한 그래픽디자이너를 쓰든 대본이 부실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기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에 대한 투자나 대우에 인색하다.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수억 원을 버는 미식축구 선수에게 노조를 하라고 했다. 방송계도 그렇다. 본인의 신분·수입이 중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자’라는 단어 이미지가 왜곡돼 있다. 수백 억 버는 사람도 노조원이다.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영화배우 이병헌, 개그맨 유재석, 배우 이순재 선생도 연기자노조 조합원이다. 유재석 선생(그는 연예인의 경우 이름만 쓰는 언론과 달리 유재석에게 꼭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다)은 수년째 조합비를 가장 많이 낸 연기자노조 조합원이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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