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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10년 안에 괴테전집 내고 여주에 괴테마을도 만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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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독문학자 전영애 명예교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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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는 시 형식으로 된 연극 대본입니다. 이미 한국어로 된 번역이 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이 작품이 본래 운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번역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고 풀어 쓰고 윤문을 한 경우들이 많았지요. 저는 가능한 한 독일어 원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시적 여운을 느낄 수 있는 번역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극 <파우스트>(전2권, 도서출판 길)를 독·한 대역으로 출간한 독문학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는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이해”라며 “매끄럽게 읽히도록 한다면서 윤문을 하면 독자가 원문에 접근할 길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강조했다. 3일 경기 여주 자택에서 만난 전 교수는 “괴테는 너무 큰 사람이라서 젊은 날부터 좋아하기는 버겁다. 나도 카프카에서 시작해 다른 작가들을 거쳐 좀 나이 들어서 괴테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괴테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쓰고 그럼으로써 문학과 시대 자체가 바뀌도록 한 사람입니다. 괴테 이전 독일 문학은 촌스러운 지방 문학이었는데, 괴테와 더불어 비로소 세계 문학이 되었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건 계약을 맺는 학자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괴테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라 민간 전승을 각색한 것이다. 괴테 이전에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인 영국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으로 이 전승을 먼저 작품화했고, 20세기에는 토마스 만이 음악가를 주인공 삼은 예술가 소설 <파우스트 박사>를 쓴 바 있다.

한겨레

“괴테의 <파우스트>는 중세 기독교권의 권선징악 이야기를 근대적 주제로 바꾼 위대한 작품입니다. 기존 파우스트 이야기에서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 기간을 24년으로 한정했던 데 반해, 괴테의 <파우스트>는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로 바꾸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침 없는 욕망에 추동되는 근현대적 삶의 핵심을 비중 있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죠.”

전영애 교수의 <파우스트> 번역에서 독일어 어순을 좇으면서도 운문의 리듬감을 살린 사례는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인식했으면, 무엇이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지”(382~3행)라든가 “신들을 나는 닮지 않았다! 너무도 깊이 그것이 느껴진다./ 버러지를 나는 닮았다, 흙먼지를 헤집는 버러지를”(652~3행), “아! 한데 우리는 찾을 수 없군요,/ 그리스도를 이제 여기서는”(755~6행) 등이 그 몇 예다.

독일어 원문에 충실하다 보니 기왕의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익숙해진 문장이 어색하게 바뀐 듯한 대목도 있다. “여보게, 모든 이론은 잿빛이고,/ 생명의 황금 나무는 영원히 푸르다네”(2038~9행)라는 유명한 문장을 전 교수는 “잿빛이라네, 이보게, 모든 이론은,/ 한데 초록빛이지, 생명의 황금 나무는”으로 새겼다.

‘괴테 저술 정수’ 20권 전집 계획
최근 첫 책 ‘파우스트’ 대역본 내
“괴테는 자신에게 절실한 것 써
문학과 시대까지 바뀌게 했다”


바이마르 ‘괴테 금메달’ 수상자
“‘파우스트 극장’도 만들겠다”


어순의 차이는 아니지만, 독자들 사이에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될 만한 번역은 따로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금언으로 익숙해진 ‘천상의 서곡’ 중 주님의 말씀을 전 교수는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317행)로 옮겼다. ‘노력’이 ‘지향’으로 바뀐 것인데, 그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동사 ‘streben’의 활용형 ‘strebt’이다.

“이 문장은 1만2111개 시행으로 된 <파우스트>의 주제가 응축된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번역이 ‘노력’에 다소 지나치게 비중을 두어 왔다는 판단에 따라, 오랜 생각 끝에 굳어진 번역을 바꾸었어요. ‘streben’이 불철주야, 일로매진 같은 의미보다는 마음속의 솟구침을 더 많이 담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파우스트> 번역은 전 교수와 출판사가 계획하고 있는 전20권 규모 ‘괴테 전집’의 출발이다. 전집이라고는 해도 괴테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글을 모두 망라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 한국 독자들에게 의미가 있고 필요한 것들을 선별해서 괴테 저술의 정수를 선보일 생각”이라고 전 교수는 말했다.

“제가 2011년 바이마르 괴테학회에서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이 상의 140년 전통에서 외국인이 받은 건 몇 번 안 되고 한국인으로는 제가 처음이었죠. 그때 수상 연설에서 ‘이 영예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겠다. 응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괴테 전집은 저에게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로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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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는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서·동시집>과 자서전 <시와 진실>(공역), 그리고 식물론·색채론 등 자연과학 분야를 비롯해 전체의 3분의 1 내지 절반 정도는 번역이 끝나 있다”며 “<파우스트>에 이어 내년 봄에 <서·동시집>을 내고 서간집 세 권을 차례로 내는 등 10년 안에는 전집을 완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괴테의 고향 바이마르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괴테학회에 1995년부터 빠짐없이 참석해 왔다. 올해도 지난달 12~15일 열린 학회의 ‘단상 토론’에 참여해 한국어판 괴테 전집 계획을 소개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여주 자택을 중심으로 ‘괴테 마을’과 ‘파우스트 극장’을 만들 계획을 밝히자 초면인 노부인이 유로화가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고.

“괴테 전집은 이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했다가 흐지부지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겠죠. 오죽하면 저 혼자서라도 전집을 번역해 내겠다고 나섰겠습니까. 일단 시작한 일이니까 만사 작파하고 괴테 전집 번역에 제 시간과 능력을 다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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