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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흑치상지의 임존성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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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서 무공 떨친 백제의 장군 / 격변기 백제 망국의 恨 품은 요새

오늘은 불가불 새벽길을 떠나야 한다. 장항선 용산발 예산행 오전 6시21분. 집에서 용산까지 시간이 또 꽤 걸리니 마음 불편하기 짝이 없다. 새벽 3시30분에 벌써 눈이 떠져 단편소설 두어 편 읽자 날이 어슴푸레 밝아온다. 이제 씻고 떠나야 할 때다.

옛날에 빙허(憑虛) 현진건 고택이 서울 부암동에 있었단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근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부암동에 터를 잡고 양계를 한다. 하지만 신문사를 그만둔 그를 찾아오는 친구들 덕택에 ‘닭머리’가 점점 줄어들어 버렸단다.

세계일보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그런 그의 역사소설 중에는 잘 알려진 ‘무영탑’도 있고 그 후에는 신문에 얼마간 연재하다 강제 중단된 ‘흑치상지’도 있다. 그가 역사소설에 집념을 보인 것은 대략 1936년 이후의 일이지만 그는 일찍이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 ‘동명’의 기자로 일했다. 최남선은 나중에 ‘변절’했지만 조선 역사에 밝고도 새로운 이해를 추구한 사람이었다. 불국사 석가탑을 ‘조영’한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내 아사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 것이 ‘무영탑’이었다면 ‘흑치상지’는 백제 멸망의 격변기에 유민들을 이끌고 지금 충남 예산군 광시면의 임존성에서 저항투쟁을 벌였던 ‘영웅’ 흑치상지의 이야기다.

언젠가 부여에 갔더니 그곳 무슨 기념관 서점에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이라는 게 있어 유심히 펴 읽다가 사고 말았다. 펴낸 출판사는 ‘주류성’이라고 임존성과 함께 백제 저항, 부흥 운동의 핵심 거점으로 알려진 성을 이름 삼은 곳이었다.

대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 인물들에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실들이나 설화들 말고 이른바 ‘평전’이라는 큰 이야기를 꾸밀 만한 이야기가 남아 있던가. 그런데 이 책의 필자는 흑치상지 기록이 드물게 많다 한다. 어째서 이 흑치상지 장군은 백제 왕족의 후예로 당나라와 신라에 반기를 들어 일어섰으되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던 것이며, 그럼에도 삶을 어떻게 이어 당나라로 가 다시 장수가 돼 공을 세우기도 하고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당했더란 말인가.

나의 이 질문은 단순한 호사취미만은 아니다. 현진건은 그 시절에 어찌하여 이 흑치상지 이야기를 쓰려 한 것일까. 때는 1940년, 일제의 폭력이 한층 더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이런 문학사적 문제 말고도 나는 윤봉길이며, 박헌영이며, 한용운 같은 ‘투쟁가’들의 숨결이 깃든 이 임존성 해발 483m 봉수산 기슭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8시 조금 넘어 예산역에 도착해 예약해 둔 차를 부려 임존성 찾아 광시면과 홍성군이 만나는 곳으로 향하는데 길가에 표지판 하나, ‘화랑묘’라는 것이 보인다.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는데, 백제 망국의 한을 품은 임존성 가는 길에 어찌하여 ‘정복자’를 기리는 사당을 세웠더란 말인가. 그 세운 때가 1965년이라 한다.

요즘에 ‘내비’ 말을 잘 들어야 한다지만. 시키는 대로 ‘봉수산로 348길’이라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외줄기 차 한 대밖에 못 다닐 가파른 길을 타고 올라간다. 칡넝쿨 우거진 ‘임도’ 같은 비좁은 길을 한참을 기어가자 어느새 찾는 임존성이 모습을 나타낸다. 성곽 위로 올라서자 어째서 이곳이 난공불락 요새였는지 알겠다. 비록 아주 높다 할 수 없어도 주위에 견줄 산이 없다. 성 안에 우물이 셋이나 있고 계곡이 좁아 위로부터 ‘수공’이 가능했다고도 한다.

개망초꽃, 달맞이꽃 우거진 산길 따라 올라 저 아래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예로부터 이곳 사람들 마음이 뜨거운 것은 다 내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나라의 ‘존망’이 눈앞에 펼쳐질 때 가만히 죽어지내기도 쉽지만은 않다. 문학은 그 뒤를 따라 기억하고 되살릴 수도 있어야 하리라. 내려오는 길에 검정나비들이 유난히 많이 하늘거린다. 흑치상지의 ‘흑치’는 이가 검다는 뜻만은 아니었다는데, 그래도 나비들은 옛날 한 많은 장수의 혼을 품고 떠다니는 듯하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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