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8 (수)

회계사가 비리 저질렀어도 그가 만든 감사보고서는 유효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보완 필요한 회계 감사 법규

회계사가 잘못했더라도 그가 만든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

"윤창호법이 생각나요. 사람 하나 죽어야 법이 바뀌는 나라인데, 기업 하나 망해야 법이 바뀔까요."

디스플레이 장비를 만드는 중소기업 A사 관계자는 이렇게 푸념했다. 이 회사는 2017년까진 300억원대 매출을 올리며 친환경 금속막 코팅 기술 등 22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산업자원부가 주최하는 산업기술상을 받은 실적도 있는 강소(强小)기업이다. 하지만 지난 3월 회계 감사를 진행하던 회계사 이모씨가 요구한 억대의 금품을 거절했고, 이후 회계사의 '의견 거절' 판정을 받아서 몇 달째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본지 4월 20일 자 B9면〉. 의견 거절은 필요한 자료가 부족해 제대로 감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의견 거절 판정은 기업 경영이 정상이 아니라는 신호를 담고 있어 주식시장에서 퇴출되거나 투자금 회수 등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웅진그룹 계열사인 웅진에너지가 회계 감사에서 의견 거절 판정을 받은 뒤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 여파로 웅진그룹은 어렵게 재인수한 코웨이를 다시 시장에 매물로 내놓아야 했을 정도다. A사 역시 지난 3월 나온 감사보고서에서 최종적으로 의견 거절 판정을 받았다. A사 관계자는 "이씨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 보복으로 의견 거절 판정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사는 이씨의 금품 요구가 협박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보고 경찰에 형사 고소했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 12일 이씨가 감사보고서를 놓고 A사에 억대의 금품을 위법하게 요구했다고 보고 기소 의견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공인회계사협회도 윤리위원회에서 이씨 문제를 조사 중이다.

문제는 회계사에게 비리 혐의가 있다고 해서 감사보고서가 곧바로 무효가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A사는 문제의 감사보고서를 파기하고 새 감사를 받으려 했지만, 유관 기관인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 모두 "이씨의 행위에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법규상 당장 기존의 감사보고서를 무효로 하고 새 감사를 받게 해줄 수단이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외부감사법(외감법)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회계사 또는 회계법인과 맺은 감사 계약을 파기하고 감사보고서를 무효로 만들 수 없도록 여러 규제를 두고 있다. 과거엔 회계사가 을의 위치였기 때문에 갑인 회사에 휘둘려 부실 감사를 하지 않게 보호 장치를 둔 셈이다. 하지만 외감법 개정으로 회계사의 권한이 강해지면서 갑을 관계가 뒤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지금은 회계사가 도리어 이런 보호 장치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감법 13조는 감사인이 회계 감사와 관련하여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경우 해당 감사인과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A사는 이 조항에 따라 이씨와의 감사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지 여부를 금감원에 질의했으나 "이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답변을 들었다. 13조 조문에는 상장사나 대형 비상장사, 금융회사의 경우만 규정하고 있어서 A사 같은 중소기업은 이 조문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이에 A사는 금융위를 통해 해당 조문을 넓게 해석해서 적용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금융위는 금감원과 협의했지만 다시 한 번 부정적 답변만 돌아왔다. 그 대신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에 의뢰해 이씨와의 감사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지 여부를 다시 한 번 판단해 보겠다고 했다. 증선위가 비상장사 회계 감사에 관한 감독기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선위 역시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 역시 외감법 때문인데, 금감원과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외감법에는 회계법인이나 회계사와 계약을 맺었다가 해지할 때는 그해 안에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8년에 맺은 계약은 2018년이 지나기 전에 파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업의 한 해 경영을 감사하는 데 몇 달이 걸린다. 이 때문에 전년도 감사보고서는 다음 해 3~4월쯤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외감법 규정대로라면 감사보고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져도 이미 시간이 지나버려서 해당 감사인과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입법할 때 세부 사항에서 부족했던 점이 있었던 것 같다"며 "입법을 통해 보완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사 관계자는 "보험을 포함한 금융거래가 모두 끊겨 위기"라며 "올해 해외 사업 쪽이 잘 풀리면서 700억원대의 매출까지 바라봤는데, 잘못된 감사보고서 하나 때문에 구제도 못 받고 그러다 기업이 망하면 누가 책임져주나"라고 말했다.

[권승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