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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고노 "잠깐만" 한국대사 말 끊고 "한국 제안, 지극히 무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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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보복]

우호국 간에 있을 수 없는 결례… 외교街 "사실상 정치적 단교"

19일 오전 10시 10분 일본 외무성 접견실.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이, 일본 측이 징용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중재위 설치를 요구한 데 대해 한국 측이 답변 시한(18일 자정)이 지났는데도 회답이 없자 이를 항의하기 위해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招致)한 자리였다.

남 대사가 접견실에 도착했는데도 고노 외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 대사는 3분간 서서 기다렸는데도 고노 외무상이 나타나지 않자 의자에 앉은 채 2분을 더 기다렸다. 그제야 나타난 고노 외무상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태를 방치하는 것은 문제"라며 "매우 유감"이라고도 말했다. 그러자 남 대사도 메모를 꺼내 "일본의 일방적인 조치가 한일 관계의 근간을 해치고 있다"고 읽으며 반박했다. 이어 "우리 정부는 이런 노력(징용문제 해결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의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방안을 토대로 더 나은 해결책 마련을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 대사의 이 말을 통역이 전하며 "우리의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고 할 때였다. 고노 외무상이 갑자기 "잠깐 기다려 달라"며 소리치듯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한국 측의 제안은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고 이전에 전했다. 그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다시) 제안하는 것은 지극히 무례하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에서 벌어진 고노 외무상과 남 대사 간의 이날 설전(舌戰)은 한일 관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우호국 간에는 나오기 어려운 장면이 여과 없이 공개되면서 양국 정부 간 거리가 한층 더 벌어졌다. 외무성 안팎에서는 양국이 '정치적 단교(斷交)' 상태에 들어갔음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노 외무상은 남 대사와의 만남 이후 8개 항으로 된 담화 발표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을 다시 비판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바탕으로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로서는 한국 측이 야기한 엄격한 한일 관계의 현황에 비춰 한국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추가 보복 조치까지 예고한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고노 요헤이는 1993년 관방장관 자격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관여를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한 인물이다. 위안부 문제 '고노 담화' 주인공의 아들이 '강제 징용공 배상' 문제로 야기된 일본 경제 보복의 선봉에 선 모양새다.

아베 내각이 한국, 특히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보도도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경제산업성 간부가 "(우리의) 수출 관리보다 징용공 문제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수십 배 지독한 행위"라며 "문재인 정권이 계속되는 이상 (규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배상 판결 이후 우리 정부가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자민당뿐만 아니라 일반 관료들 사이에서도 한국 정부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있다"고 말했다.

아베 내각은 한국이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을 국내에서 해결하고, 한일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는 계속 강경 기조를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일본 기업이 전략 물자를 외국에 수출할 때 혜택을 주는 27개 '화이트 국가' 명단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절차를 앞당길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경우 앞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아르헨티나·불가리아보다 못한 대우를 받게 된다. 일본은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문제도 고려 중이어서 8월 중 전격적으로 관련 조치가 취해질 수도 있다.

아베 총리가 참의원 선거 이후 정국 관리 차원에서 한국에 대한 대응 강도 및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도 거론되나, 이것이 본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월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를 전제로 모든 성청(省廳)에 보복 조치 준비를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고노 외무상이 밝힌 대로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자산이 현금화될 경우엔 즉각 보복 조치에 나설 것이 확실시된다. 추가 보복 조치로는 법무성의 체류 자격 정밀 심사 및 비자 제한, 재무성의 금융 제재, 송금 제한 조치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최근 NHK방송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가 높은 공작기계와 탄소섬유를 차기 규제 대상 후보로 보도하기도 했다.

[도쿄=이하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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