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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지친 몸 끌고 떠난 여행지에서… 마음의 안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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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 특집 ① 떠나는 그대에게 권하는 책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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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야 돌아볼 수 있고, 쉬어야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날 때 챙기면 좋을 책, 집에서 한가로이 칩거하며 파고들 책을 여러 분야 애서가들에게 추천받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번 주에는 화가, 사진작가, 기업인, 건축가, 뮤지컬 배우 등 5명의 독서인(讀書人)이 '나를 어루만져준 치유의 책'을 권했다.

조선일보

화가 김병종 '마음에게 말 걸기'

"아침 7시 30분, 나는 사랑스러운 가족들에게 차례로 키스하고, 살짝 언 잔디 마당을 지나 낡고 정든 내 차에 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 내 발밑에서 사각사각 부서지던 얼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마지막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서른세 살의 상담심리학 박사였던 저자의 삶은 한순간의 자동차 사고로 무너져 내린다. 이 에세이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악마의 목구멍 앞에 선 듯한 절망을 그는 어떻게 딛고 일어서, 어둠 저편에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빛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온갖 아픔의 목록을 들고 그의 심리상담실로 찾아오는 내담자들을 통해서였다. 그는 삶은 아름답고 세상은 기쁨으로 반짝이는 것이라고, 따뜻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그가 사고 후 알게 된 다른 한 가지는 삶의 불가해성. 맥스라는 이름의 가난하고 성실한 예순 살의 재단사 이야기가 나온다. 여느 때처럼 산 복권 한 장이 당첨된다. 아내는 기뻐하며 새 양복을 선물했고, 모처럼 후줄근한 작업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출근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이 삶의 불가해성 앞에서 저자는 '놓아버리기'를 권유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려 하지 말고 다른 곳을 바라보라는 것. 그곳에 예기치 못한 설렘과 기쁨이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자 대니얼 고틀립은 자폐증 앓는 손자를 위해 쓴 '샘에게 주는 편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휴가지에서 이 굴곡진 사연들을 읽다보면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가 새삼 배가될 것 같다.

조선일보

사진작가 김명중 '걷는 사람, 하정우'

고급 외제차를 타고 강남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유리창을 반쯤 내린 채 최신 노래를 조금 과하게 틀어놓고는, 사람들이 쳐다봐주기를 바라던 그런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 내털리 포트먼, 빅토리아 베컴, 클라우디아 시퍼에서부터 무하마드 알리나 영국 찰스 왕세자같이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이들을 어렵지 않게 피사체로 담아왔다. 거기에 11년간 이어온 '폴 매카트니 전속 사진가'라는 직함까지.

우연히 배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를 만났다. 짐작건대, 배우로서의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말 그대로 걷고, 걷고, 또 걷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것이다." 하정우의 글에선 땀 냄새가 났다. '왜 걸어야 하지?'라는 생각도 잠시, 책을 덮을 즈음엔 '그처럼 나도 한번 걸어볼까?'라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걸어다니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철 속에 갇혀 순식간에 오고 가는 동안 놓쳤던 것들이 눈앞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작은 골목의 정겨운 풍경, 이름 모를 들꽃들, 엄마의 고소한 밥 짓는 냄새, 옆집 어르신의 깊이 팬 잔주름…. 사진작가로 가장 아름다운 것만 화면에 담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것을 잃고 살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문득 돌아보니, 체중 감량은 덤이었다.

조선일보

토스 CEO 이승건 '공화주의'

창업 9년째다.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회사가 커 나감에 따라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고 있다고 느낀다. 창업할 때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큰 영향을 준 책이 두 권 있다. 늘 가까이 두고 꺼내 본다. 이번 휴가 때도 초심(初心)을 떠올리며 다시 읽을 생각이다.

하나는 미국 프린스턴대 정치학 교수 모리치오 비롤리가 쓴 '공화주의'. 공화국 로마나 베네치아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지 밝히는 책이다. 공공선, 법치, 시민의 덕성 같은 가치가 공화국을 이끄는 근본적인 힘이었다고 말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구성원은 기계의 부속 같은 존재가 아니다. 직급과 관계없이 각자 동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역량에 따라 기여하고 그에 따라 동료로부터 존경을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권위를 갖는다. 회사 이름을 '비바리퍼블리카(공화국 만세)'라고 지은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화주의'를 지향하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또 하나는 19세기 영국 사상가 존 러스킨(1819~1900)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 부제가 '생명의 경제학'이다. 러스킨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정의와 애정으로 극대화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회사가 구성원을 신뢰와 애정으로 동기부여하면 스스로 즐겁게 일함으로써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모바일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토스'의 기본 철학을 이 책에서 많이 배웠다. 두 책은 회사의 비전을 발견하게 했다. 기술 혁신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물론 새롭게 일하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도 계속 헌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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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배우 김소현 '안나 카레니나'

운명처럼 다가온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 배우의 길에 접어든 지 어느덧 19년째다. 운 좋게도 꾸준히 다양한 배역을 맡아 그들의 인생을 잠시나마 살아볼 기회를 얻었다. 그런 시간들이 설레기도 했지만, 때로는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감정들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 압박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런 시간의 후유증은 꽤나 큰 것이어서, 공연을 마친 당일 밤은 물론 작품이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배역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속앓이를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그런 나에게 마치 길잡이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안나가 젊고 매력적인 장교 브론스키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예전에도 이 책을 대강 읽어본 적은 있었지만, 지난해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출연을 준비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공부하듯 읽어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두 사람의 절절한 사연뿐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이 지닌 각자의 인생이다. 처음엔 나의 배역인 안나에게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게 됐지만, 작가 특유의 세밀한 심리 묘사 덕에 점차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도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예컨대 처음엔 안나를 숨 막히게 하는 남편 카레닌의 권위적인 태도가 답답했지만, 외도한 아내를 용서하고 보듬는 모습에선 사랑의 의미에 대해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다 결국은 자신들만의 사랑을 이뤄내는 레빈과 키티라는 인물들도 마찬가지. 이들의 다양한 인생사를 비교하며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찰할 기회를 얻었다. 한 가지 인생만을 살아가는 내게 이 책은 배우로 무대 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상상의 나래를 한층 더 펼칠 수 있게 해준 셈이다.

배우인 나에게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안나 카레니나'는 휴가에 한 번쯤 풍덩 뛰어들기 더없이 좋은 소설이다. 나 또한 이번엔 또 어떤 인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다시 한 번 책을 펼쳐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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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한승재 '마음'

다음날 부산으로 출장 가는 친구는 바람이라도 쐐야겠다는 내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데려가 준다는 식이었다.

친구는 일행과 함께 움직여야 했으므로 기차에서부터 우리는 따로 앉았다. 졸지에 나의 여행 파트너는 서둘러 가방에 집어넣은 이 책이 돼버렸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선생님'은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품위는 거리를 두는 데서 시작한다.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사람은 금세 관측되고, 들통나고, 너덜너덜해진다. 그는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적당한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나는 책 속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이 먼저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를 고백했다. 젊은 시절 한순간 그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아주 기민하게 행동했었다고 한다. 비겁한 방법으로 친구와 친구의 연인을 갈라놓은 뒤 그 여인을 독차지해버렸다. 그리고 고고한 척 평생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끝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극단적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버렸다. 고고한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오래 남은 것은 질투에 눈이 멀어 전전긍긍하는 그의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때 그의 모습이 가장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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