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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기자의 시각] 윔블던 챔피언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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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양지혜 스포츠부 기자


지난 일요일 열린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32)는 외로웠다. 센터코트 만원 관중이 세르비아 남자에게 발산하는 혐오와 멸시의 에너지는 2000년 전 로마 콜로세움에서 막 넘어온 듯했다.

세계 최고 인기를 누리는 스위스인 검투사 로저 페더러(38)의 찬란한 승리를 위해 피 흘려야 하는 짐승이 조코비치였다. 그가 비디오 판독을 요구하면 야유가, 실수하면 박수가, 땀 닦으면 비아냥이 쏟아졌다. 살기(殺氣)마저 번뜩였던 경기장 분위기는 과거 모니카 셀레스(역시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다)가 1993년 독일에서 경기 중 칼에 등을 찔린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조코비치는 작년에도 우승한 통산 4회 윔블던 챔피언이자 현 세계 1위인데도 이번 대회 기간 센터코트에서 종종 빠졌다(세계 3위 페더러는 항상 센터코트였다). 페더러 가방은 한 번 만져보는 것만으로 감격하는 보안 요원들이 조코비치 가방은 라켓까지 살폈다. 페더러가 인터뷰룸에 나타나면 밥 먹다 뛰어가던 영국 기자들이 조코비치 회견은 중계 화면 시청으로 대신했다.

왜 이렇게 무시할까. 한때 대영제국으로 세계를 거느렸던 영국은 유럽 역사의 변방에 있었고 냉전 시대엔 공산주의를 택해 경제적 격차가 더 벌어진 동유럽 국가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터지면서 많은 이들이 서유럽과 북미 등지로 탈출해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활 기반을 잡았다. 여자 단식 우승자 시모나 할레프(28)의 조국 루마니아는 성매매 여성 공급지로 악명을 떨치는 나라다.

결승전 당일 페더러는 비공개 훈련을, 조코비치는 센터코트 앞 공개 훈련을 했다. 조코비치를 동서남북으로 에워싼 팬 중에서 일부가 "로저 힘내라(Go, Roger)"고 집요하게 외쳤다. '씩' 웃고 마는 조코비치를 보면서 그가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결국 결승전에서 4시간 57분을 버텨낸 조코비치가 다섯 번째 윔블던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졌던 저주를 기어이 박수 소리로 바꾸고 트로피를 들었다.

올해 윔블던에선 15개 종목 우승자가 나왔다. 남자 복식의 로베르트 파라(32)-후안 세바스티안 카발(33) 조는 첫 콜롬비아인 윔블던 챔피언이 됐다. 다리아 스니구르(17·우크라이나)는 시드도 없이 출전해 미국의 쟁쟁한 테니스 아카데미 출신들을 제치고 주니어 여자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여자 휠체어 단식 우승자 아니엑 반쿠트(29·네덜란드)는 오른 다리가 짧게 태어나 잘라냈다. 그가 휠체어 바퀴를 맹렬히 밀어서 채찍 휘두르듯 포핸드 치는 걸 보면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처럼 전율이 돋는다. 윔블던은 노력하면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챔피언 왕관을 허락했다. 가난, 국적 차별, 신체적 장애 등 어떠한 것도 핑계가 되지 않았다.

[양지혜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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