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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생략하면서 죽어갔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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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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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아포리즘-59]

#142

너는 그렇게 환했었다

#143

조각가 권진규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친구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한 구절. 나는 그 말을 오랬동안 곱씹었었다.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어느날 동일한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다.

차가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갈 땐 항상 혼자였습니다.

죄송하게도 난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슬픈 집에서 가지고 나온 연민과

내가 서 있는 샛길이 전부였습니다.

들키지 않은 채

절반도 감기기 전에 끊어진 청춘

내 사랑은 나를 넘어뜨리고 달려가 버린 것들 중에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제

그것들은 내 눈에서 흐르지 않습니다.

지겹게 내뱉었던 인사말,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팔꿈치가 져렸습니다.

간직하기에 너무 힘든 나는 섬이었고,

결국 섬은 내 마음 밖으로 나가주질 않습니다.

무덤덤하게 몰아쳤던 시퍼런 파도야 잘 있거라.

허전한 기억들아,

당신에게조차 가기 힘들었던 겨울이었습니다. 잊기 힘든.

고맙습니다.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었습니다.

- 시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전문

#144

1980년대 중반 샘터화랑에서 열렸던 전시회에서 권진규의 작품 '지원의 얼굴'을 실제로 봤다.

미술잡지에서 오려내 책상 앞에 붙여 놓았던, 오랫동안 사진으로만 뚫어지게 봤던 그 테라코타를 봤다.

피가 머리 끝으로 몰리는 듯했고 오한이 일었다.

낡은 삼선교 작업실에 써 있었다는 그 말, '인생은 공(空) 그리고 파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누구는 설명하면서 죽어가고… 누구는 생략하면서 죽어간다.

권진규는 생략하면서 궁극으로 갔다. 그에게 찬사를.

[허연 문화전문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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