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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전문가 시대는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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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이반 일리치(1926~2002)

학교·병원도 비판한 근본적 사상

권위·형식주의와 담쌓은 자유인

학문공동체에선 돈 내고 가르쳐



한겨레

사상가이자 신부인 이반 일리치가 자란 동네를 찾아 지난달에 다녀온 크로아티아의 서부, 아드리아해 연안의 달마티아는 아직도 시골 내음이 났다.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얼룩반점 개 달마티안의 원산지인, 소박한 동유럽 발칸반도의 달마티아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일리치의 소박한 자율의 삶과 생각의 기본이 되었다. 동유럽 출신의 비주류 사상가들이 서유럽 주류의 사상을 전복하는 이단의 혁명은 일리치의 경우에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는 유대인인 일리치는 유럽을 뒤덮은 반유대주의 탓에 대도시인 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리치는 프로이트의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다시 1942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도피해야 했고, 10대의 나이로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신부가 되기 위해 로마 바티칸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 이어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해 아널드 토인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암 고통, 아편 가루로 버티며 저술

폭넓은 지식과 11개 언어에 능통해 바티칸 국제부에 들어갔으나, 가톨릭의 관료주의와 배타적인 보신주의에 질려 곧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1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중세사상을 연구하다가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을 위해 4년간 신부로 일했다. 1956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돼 남미에서 활동할 사제들을 위한 집중훈련센터를 설립했으나, 기독교당 결성에 반대하고 가톨릭이 반대한 산아제한에 찬성한 탓에 부총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후 도보로 남미를 횡단했다.

1961년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 대안적 학문공동체인 ‘국제문화형성센터’(1967년 ‘국제문화자료센터’로 개칭)를 세우고, “학문이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므로 함께 사례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돈을 내고 가르치며 사람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막 시작된 미국 중심의 후진국 개발을 자립자존적 생활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이를 지원한 로마가톨릭을 ‘문화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1968년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에 가까운 심문을 받고, 결국 1969년 ‘정치적인 부도덕’을 이유로 사제직에서 쫓겨났다.

당시 그는 무기를 든 카밀로 신부와 카리스마적인 해방사상가인 카마라 신부와 함께 ‘위험한’ 진보적 신부로 불렸으나, 그들과 달리 일리치는 산업사회의 산업적 생산방식 대신 기존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자율적 공동사회 구축을 위한 일상생활의 저항적 삶을 제창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즉, 1971년 학교를 비판한 <학교 없는 사회>, 1973년 교통체계를 비판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기술사회를 비판한 <절제의 사회>, 1976년 의료제도를 비판한 <병원이 병을 만든다>, 1977년 전문가사회를 비판한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를 발표해 학교와 병원은 각각 교육과 건강의 장애물이며, 근대화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근대화하고, 국가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은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자율적 생활 주체였던 민중이 그들의 고유한 기술을 박탈당하여 건강은 의사에게, 공부는 교사에게, 교통은 자동차에, 놀이는 텔레비전에, 생존은 임금노동에, 남녀의 고유한 성적 차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의해 중성화되는 과정으로 봤다. 따라서 그는 경제발전은 수요에 의한 노예화이지 희소성으로부터의 자유화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와 같이 경제발전이 인간에게 더욱 큰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1968년 학생운동 이후 서구의 소비풍요사회,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의해 생겨난 잘못된 수요로부터 민중의 자율적 능력을 지키고자 한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6년 센터가 폐쇄되자, 독일과 멕시코를 왕래하면서 중세사를 중심으로 한 저술 및 강의 활동을 한 그는 1970년대 저술과 같은 충격을 던지지는 못하고 오랫동안 잊혔다. 그러나 1978년 노동의 환상을 비판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1981년 여성 노동을 분석한 <그림자 노동>, 1982년 여성문제를 다룬 <젠더>, 1985년 물질의 역사성을 다룬 , 1988년 독서 능력을 다룬 , 1992년 상식과 진보를 비판한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993년 지식이 책으로 획득되는 기원을 다룬 <텍스트의 포도밭> 등은 1970년대의 계몽적 저술을 심화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1992년 암에 걸려서 한쪽 뺨에 자라는 커다란 혹이 주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일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진통제를 대량 투여하는 치료를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아편 가루를 먹으면서 10년간 일하다가 2002년 독일 브레멘에서 76살에 숨졌다.

그의 공식 직함은 신부나 교수였지만, 교수로서는 물론이고 신부로서도 권위주의나 형식주의와는 담을 쌓은 자유인이었다. 죽기 몇년 전 브레멘시로부터 평화상을 받았을 때 그는 수상식장의 화려한 분위기에 대한 묘사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가 그가 브레멘에 갈 때마다 묵었던 친구 집의 소박하고 개방된 분위기, 누구나 초대받는 스파게티와 포도주의 파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활발한 토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거나 멋대로 잠을 자기도 하는 우정과 환대의 묘사로 바꾸어갔다.

일상 바꾸려는 작은 노력 중요

에리히 프롬은 일리치 사상을 근원적 휴머니즘이라고 불렀다. 일리치가 쿠에르나바카에 살았을 때 프롬도 이웃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매우 친했다. 당시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프롬은 일리치가 학교를 신화를 창출하는 의례라고 말하자, 충격을 받아 일리치를 만나려 하지 않았을 정도로 일리치의 사상은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것이었다. 그의 <학교 없는 사회>는 학교를 지옥처럼 지낸 루저인 나에게 잃어버린 청춘의 정당성을 회복시켰기에 기꺼이 번역했으나, 지금도 우리는 학교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보다 먼저 1980년대에 번역한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 <그림자 노동>, <절제의 사회>도 아직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제3세계의 고유문화와 중세적 자연법 사상 위에서 현대문명을 비판한 일리치는 학교부터 교통, 의료, 성, 노동에 이르는 일상생활의 제자리 돌려놓기, 즉 교육과 문화, 의료와 교통, 자연과 환경, 성과 언어, 학문과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의 개인의 자율을 주장하며 국가, 자본 및 전문가들의 지배에 철저히 반대했다. 그의 사상은 정치, 사법, 관료, 군대, 공장, 기업 따위의 수많은 제도, 나아가 현대문명 전반에 걸친 비판으로 이어지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거대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의 제도화된 오류를 극복하고 반드시 회복해야 할 우리의 소박한 자율과 자족의 삶 그 자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일리치는 20세기를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했다. 그런 전문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화려한 이데올로기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들 일반시민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근원적으로 바꾸어보려는 작고 소박한 희망이 더 중요하다. 권력이나 자본과 거리를 두는 것은 물론, 도시나 아파트, 학교나 병원, 골프나 헬스, 자가용이나 방송, 외식이나 먹방,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등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허위의 주류적 일상과 거리를 두는 저항이 필요한 시대에 이반 일리치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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