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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배틀그라운드] 치열했던 화살머리고지…"내 머리 위 포 쏴라" 적과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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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유해 25구 동시 발견돼

아군·적군 같은 장소에서 전사

소련제 따발총·수류탄 한가득

지뢰·폭발물 제거해 안전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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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현장. 유해 곁에서 다양한 유품이 발견된다. 허리 위치에 벨트 버클, 다리 아래 부분 중공군 방독면이 함께 발굴됐다. 영상캡처=공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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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머리고지에 도착하자 길이 50m 교통호 안에 뒤엉켜 있는 전사자 유해 25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많은 전사자가 동시에 발견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전쟁(6ㆍ25 전쟁) 때 사용했던 녹슨 국군 방탄모가 형태를 유지한 채 드러났다. 바로 옆에선 중공군이 사용한 소련제 기관단총이 발견됐다. 실탄은 약실에 장전된 채였다. 당시 치열했던 고지전 전투 현장 모습을 66년 만에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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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와 참호를 이어주는 교통호에서 유해 25구가 동시에 발견됐다. 영상캡처=강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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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전 6시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DMZ)로 들어서는 통문 앞에 도착했다. 휴대전화와 각종 통신장비를 맡기고 방탄모와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 현장은 군사분계선(MDL)과 불과 수 백m 거리. 이날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장소는 MDL과 100m 정도다. 백마고지에서 남서쪽 3㎞ 떨어진 해발 281m 고지인데 화살촉처럼 남쪽으로 돌출돼있어 화살머리고지라 불린다. 화살머리고지 전투현장은 MDL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걸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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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통문이 열리고 DMZ 안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영상캡처=강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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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략적 요충지로 1953년 6월 12일부터 휴전(7월 27일) 직전까지 주요 전투를 4번 치르며 뺏고 빼앗기는 고지 쟁탈전을 이어갔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사투였다. 국군(9사단ㆍ2사단)과 유엔군(미군 2사단ㆍ프랑스군 대대)은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던 중공군(126사단ㆍ113사단ㆍ73사단) 공세를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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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첫 공동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하는 화살머리고지. [자료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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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은 컸다. 국군 200여 명과 유엔군 100여 명이 산화했다. 중공군 사망자는 3000여 명에 이른다. 참전용사 증언에 따르면 화살머리고지에 떨어진 포탄은 1000발이 넘는다. 긴박했던 전투를 치르면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가 전투현장에 많이 남았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대략 300여 구를 발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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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 당시 전투에 나선 병사가 능선 반대편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있다. [사진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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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머리고지 GP에서 내려다본 MDL 주변은 짙푸른 수풀 아래 녹음이 가득했다. 사방은 오랜 세월 전사자 침묵을 지켜온 듯 고요했다. 멀리 능선 위에 세워진 북측 GP가 작은 점으로 겨우 보일 뿐이다.

유해 발굴 현장에 도착하자 전쟁이 남긴 상처가 드러났다. 이름 모를 희생자가 눈에 들어왔다. 국유단 발굴 부팀장 김기성 하사는 붓으로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호미와 붓으로 천천히 진행하는 섬세한 발굴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유해 1구를 수습하려면 1~3주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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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 부팀장 김기성 하사가 조심스럽게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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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전황 흔적을 참호와 교통호가 60여 년 동안 안고 있었다. 참호 사이를 이어주는 교통호에서 유해 25구가 동시에 나왔다. 국유단 안순찬 조사팀장은 “발견된 두개골을 세어 보며 25구 정도로 추정했다”며 “두개골이 남아있지 않는 경우도 있어 더 많은 유해가 발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지전 당시 아군과 적군이 번갈아 가며 참호를 차지했다. 때로는 아군과 적군이 참호와 교통호 안에서 생사를 건 백병전으로 싸우다 함께 전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발굴 현장에서는 아군과 적군 유해가 동시에 발견돼 당시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짐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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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화살머리고지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이 6.25 당시 전사한 국군 유해를 발굴해 수습하고 있다. 고 박재권 이등 중사로 신원이 밝혀졌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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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유해 발굴에 투입된 병력은 국유단 40명과 5사단 100명이다. 유해 발굴은 지난해 9월 남북이 공동 유해 발굴에 합의하며 시작했다. 이달 8일까지 100여 구를 발굴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첫 국군 유해 고 박재권 이등 중사, 지난 6월엔 유엔군으로 추정되는 전사자 유해를 처음으로 수습하기도 했다.

중공군 유해는 중국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다. 한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과 한·중 관계 발전을 고려해 2014년부터 올해까지 중국인 유해 599위를 송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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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당시 교통호 일부를 철 기둥과 통신선을 엮어 동굴로 만들고 여기에 몸을 숨기고 진내사격을 요청하기도 했다. 국유단 발굴팀장 강재민 상사(오른쪽)가 기자에게 당시 구조물을 설명하고 있다. 영상캡처=공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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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지 쟁탈전에서는 공격과 후퇴를 반복했다. 일진일퇴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기도 했다. “내 머리 위로 쏴라.” 마지막 순간에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인 상태에서 포격 지원을 요청한 뒤, 아군은 참호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했다. 이른바 목숨을 건 최후의 '진내사격'이다. 참전 용사 증언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무용담은 사실로 확인됐다. 참호와 교통호에선 그때 사용하던 철 기둥과 통신선으로 만든 구조물이 발견됐다. 국유단 발굴팀장 강재민 상사는 “동굴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지 않고 교통호 일부 구간을 철항(기둥)과 철조망을 이용해 엄폐호처럼 구축한 뒤 대피했다”고 설명했다. 강 상사는 “동굴작전 현장 인근에서도 17번째 유해가 발굴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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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 당시 포격전 [사진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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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 현장은 타임캡슐 그 자체다. 국군 인식표와 함께 미군 방탄복ㆍM1 탄알이 쏟아져 나왔다. ‘따발총’이라 불리던 소련제 PPSh41 슈파긴 기관단총과 중공군 방독면ㆍ만년필 등이 유해 곁에서 발견된다. 그뿐만 아니라 MK-2 수류탄ㆍ막대형 수류탄과 불발된 각종 포탄도 나왔다. 지뢰가 매설된 지역이라 발굴 과정에서 무엇보다 안전 확보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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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이라 불리던 소련제 슈파긴 기관단총 총열 사이로 나무가 자라면서 세월이 관통한 흔적을 남겼다. 나무로 만들어진 개머리판은 녹아내려 흔적이 없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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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에 앞서 지뢰탐지병ㆍ폭발물처리반을 투입해 위협 요인을 확인해 제거한다. 육군 5사단 이시호 일병은 “지뢰ㆍ폭발물이 발견된다”며 지뢰탐지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려줬다. 지뢰탐지병은 방호복과 탐지 장비 등 무게가 25㎏이 넘는 장비를 갖추고 가파른 산을 오르며 지뢰탐지 작전에 나선다. 이날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무더운 날씨였지만 예외가 될 수 없다.

유해 발굴에는 탄력근무를 적용한다. 하절기 무더운 날씨를 고려해 오전 6시부터 DMZ로 들어와 오후 1시에 철수를 시작한다. 질병과 사고에 대비해 의무병과 자동심장충격기(AED)도 배치됐다. 이날 현장을 찾은 육군 제5사단장 이상철 소장은 “틈틈이 찾아와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며 신경 쓰고 있다”며 “장병들이 무더운 날씨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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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발굴에 앞서 지뢰탐지병 지뢰와 폭발물을 찾아내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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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분계선과 근접하기 때문에 북한군과 충돌할 위험도 없지 않다. 흰색 방탄모를 쓴 병력이 경계 작전에 나섰다. 비무장 상태로 배치돼 발굴 현장 주변을 살폈다.

유해 발굴은 단순히 땅을 파는 작업이 아니다. 주황색 방탄모를 착용한 5사단 장병이 기초발굴을 시작한다. 지나간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0㎝ 이상 흙이 쌓였다. 쌓인 흙을 제거하다 유해가 발견되면 유해 발굴 전문부대인 국유단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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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곁에서 탄알과 포탄이 함께 발견된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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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단 이주현 상사는 6년째 임무를 맡고 있다. 그동안 그가 수습한 유해만 250구를 넘어선다. 국유단 발굴병은 지원자 중에서 전공과 역량 등을 심사해 선발한다. 발굴 현장에서 만났던 국유단 이정훈 상병은 대학에서 역사교육학, 김진수 일병은 생물학을 전공하다 입대했다. 유해 발굴에 필요한 분야다.

유해 발굴 현장에서 이 상병과 김 일병은 입관 절차를 시작했다. 수습된 유해는 한지로 싼 뒤 예단과 함께 관에 담는다. 이어 관 머리 부분 위에 혼백(신위)을 올린 뒤 ‘6ㆍ25전사자지구’라고 쓰인 명장과 태극기를 덮어 임시 봉인하는 관포를 진행한다. 유해를 배치하는 위치와 순서도 규정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통 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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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단 발굴병 이정훈 상병(아래)과 김진수 일병이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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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만에 빛을 보는 유해를 수습한 장병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김 일병은 “전사자 덕분에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 수 있다”며 “복무하며 영령들을 모시게 되는 기회를 갖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발굴된 유해는 입관 이후 약식제례를 지낸 뒤 발굴 현장 인근에 마련된 임시감식소까지 전용 차량으로 봉환한다.

임시감식소에 도착하면 이때부터는 감식관·감식병의 임무가 시작된다. 흙과 먼지를 털어내는 세척 작업과 유품 확인에 나선다. 이후 서울 국유단 중앙감식소에서 DNA 분석 등 정밀감식을 거쳐 신원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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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감식소에서 세척을 하고 있다. 이후 국유단 중앙감식소로 이송돼 정밀감식을 거쳐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한다. 박용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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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욱구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미군은 1950년 파병에 앞서 미군 모두 치과 X-ray 사진을 촬영하는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며 “국군은 병적기록도 찾기 어려워 신원 확인이 어렵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미군은 발굴된 유해 두개골 치아를 X-ray 사진과 비교해 신원을 확인한다. 확인할 치아가 없으면 DNA 분석으로 유족과 비교해 찾는다. 그러나 국군은 전쟁 당시 X-ray 촬영을 하지 않았다. 인식표 또는 DNA로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지만, 유족 DNA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소극적인 북한 태도는 아쉽다. 남북은 지난해 11월 유해발굴을 위한 도로를 연결하며 본격적인 발굴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후 북한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한국은 약속했던 올해 4월부터 단독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오는 10월이면 합의했던 기간은 종료된다. 휴전선 넘어 북한 측 지역에도 국군과 유엔군 전사자가 남겨져 있는 상태다.

철원=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영상=강대석·공성룡 기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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