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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전직 물리교사가 ‘문송합니다’ 말을 없애고 싶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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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과학 크리에이터 이효종씨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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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인생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은 처음이다.’ 이효종(30)씨가 고등학교 물리교사 시절 교원평가에서 한 학생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는 당시 ‘열정 물리쌤’이었다. 공식 하나 가르치겠다고 실험을 하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그때마다 학생들의 눈은 반짝였다. 그러나 그 빛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물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이런 실험도 일시적 ‘눈길 끌기’에 불과했어요.”

교사로 일한 지 2년 만에, ‘열정 물리쌤’은 교단을 내려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물리 공식 대신 ‘과학사(史)’를 말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는 저도 물리를 죽도록 싫어했어요. 대학에 와서야 과학사를 배우면서 물리에 흥미를 느꼈죠. 과학도 결국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더라고요. 외워서 문제 푸는 게 과학이 아니었어요.”

지난 15일 서울 용산 사무실에서 그가 물리교사에서 과학 크리에이터로 전직한 이유를 들어봤다.

“물리학 싫어하다 대학때 과학사 흥미”
고교 ‘열정 물리쌤’ 2년만에 전직 감행
“지식 넓히며 나를 키우는 삶 선택”


2017년 유튜브 ‘과학쿠기’ 채널 열어
1년남짓만 구독자 19만·조회수 900만
“인문학처럼 수다떠는 과학 알리고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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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은 그에게 엄청난 모험이었다. 아들을 교사로 키우고자했던 부모님의 소박한 꿈을 외면하기 어려웠고, ‘교사 임용이 아니면 인생 실패’라는 사범대 특유의 분위기도 신경 쓰였다. 무엇보다 교사라는 안정적인 길을 이탈해 홀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두려웠다.

“여태 공부한 걸 써먹으며 살 것인가, 지식을 확장해가며 살 것인가. 결국 이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어요. 임용시험에 나오는 물리 지식은 물리학이란 전체 학문에서 극히 일부이고, 그것만 알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문제가 없지만, 크리에이터로 살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죠. 하지만 어떤 삶이 나를 더 발전시킬지 생각했을 때 답은 크리에이터였어요. ”

바로 보릿고개가 시작됐다. 차마 학교를 관뒀다고 말하지 못한 그는 그동안 모아둔 돈을 털어 평소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는 “유튜브가 뭔지도 잘 모르는 부모님께 이걸로 먹고 살겠다고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고 했다. 설득 대신 결과물을 보여드리기로 했다. 그는 ‘과학쿠키’란 이름의 채널을 만들고 2017년 10월부터 매주 1개씩 과학사를 다룬 콘텐츠를 유튜브에 올렸다.

단 하루도 못 쉬고 영상을 찍고 편집했지만 5개월 동안 모은 구독자는 100명. 예상보다 더딘 속도에 마음은 타들어갔다. 마침내 2018년 3월 ‘대체 빛의 속도는 어떻게 알아냈을까’라는 제목의 영상이 51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영상을 유심히 본 한 박사가 이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입소문을 타면서 소위 ‘대박’ 영상이 된 것이다. 경기도 과천과학관 등 기관에서 협업 제안도 들어왔다.

“이전에는 혼자 책 읽고 공부해서 영상을 만들었는데, 협업을 하니까 전문가 인터뷰까지 넣을 수 있어 영상이 한층 풍부해졌어요. ‘꽁꽁 묶인 매듭처럼 어려운 과학지식을 느슨하게 풀어서 대중에게 전달하는 구실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뒤 그는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에 등장하는 양자역학 원리를 설명한 영상으로 대중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 영화 속 ‘앤트맨’처럼 개미만한 크기로 작아진 그가 거대한 책장 선반을 기어다니면서 원자를 야구장에, 원자핵을 야구공에 비유한 설명을 곁들이자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그는 ‘양자역학 영상에서 배운 내용을 고교 입학 시험에서 말했더니 합격했다, 나중에 나도 과학자가 되어 과학쿠키 채널에 나오겠다’는 한 중학생 시청자의 댓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제 그의 채널은 1년남짓 만에 구독자 19만명, 누적 조회수 900만을 달성했다. 지난 3월에는 그동안 유튜브에 올린 100여 개의 영상을 글로 풀어내 <과학을 쿠키처럼>(청어람e) 책도 냈다.

채널이 인기를 얻자 각종 강연·협업 제안이 밀려들었다. 촬영·편집을 외주업체에 맡기는 다른 유튜버와 달리 모든 걸 혼자 하는 그에게 버거운 수준이었다.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니까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번아웃(탈진) 증후군’이 왔죠.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제안은 받되 마감 날짜를 조정해 업무량을 조절합니다. 안정과 모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거죠. ”

유튜버 3년째인 올들어 그의 일터도 넓어졌다. 그는 휴대용 프롬프터와 카메라, 노트북을 짊어지고 독일·미국 등 국외 과학관도 누빈다. 나름의 직업윤리도 생겼다. “대중이 원하는 것과 제가 원하는 것 중에서 제가 원하는 걸 선택합니다. 조회수를 욕심내면 채널이 방향을 잃거든요. 2023년까지 만들 콘텐츠도 대략 정해뒀습니다. 직전에 올린 영상보다 기획이든 촬영이든 편집이든 뭐 하나라도 더 잘하자, 매번 다짐하며 영상을 만듭니다.”

그는 과학을 인문학 수준으로 대중화하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특히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줄임말)’라는 말을 꼭 없애고 싶다고 했다. “‘문송합니다’라는 말은 과학에 벽을 치고, 누군가의 진입을 막아요. 과학은 이과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없애고 과학을 주제로 수다떠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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