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1 (수)

[이해인 수녀의 詩편지](16)듣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서성일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귀로 듣고

몸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전인적인 들음만이

사랑입니다

모든 불행은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모르지 않으면서

잘 듣지 않고

말만 많이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외칩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하루의 문을 닫는

한밤중에

나에게 외칩니다

들었니?

들었니?

들었니?

--시집 <작은 기도>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하는 노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새해 결심을 세운 지 몇 달이 지났습니다. 자꾸만 결심을 하다보면 조금씩 실행이 잘될 것이라 믿기에 저는 오늘도 듣기 연습을 하는 초심의 수련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녀원의 지도사제에게 면담식 고해성사를 보았는데 두서없이 고백하는 저의 정리 안된 이야기를 사제는 끝까지 몸으로 마음으로 듣고 단 한마디도 중간에 끼어들거나 이런저런 훈계도 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기도의 자세로 마무리하는 걸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어떤 이야기엔 눈물까지 글썽이는 공감의 표현까지 하는 충실한 경청자였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감성이 예민하여 종종 외로움을 탈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어린 시절과 달리 수녀원에 와서 오히려 활달하고 명랑한 쪽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그래서 ‘외롭다’는 말을 좀체 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도 어느 순간 가장 외로움을 느끼느냐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기껏 마음먹고 무슨 말을 시작했는데 그 아무도 주의 깊이 들어주지 않을 때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여럿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에서도 말하는 이에게 끝까지 정성을 다하기보다는 사이사이 끼어들어 원래 말하려는 이보다 더 길게 말하고, 누가 스마트폰을 들고 나가면(양해를 구했더라도) 이내 관심이 흩어지기도 해서 말하는 이를 힘 빠지게 만드는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백명도 넘는 큰 공동체 안에 그룹으로 나뉘어 대화를 한다 해도 워낙 여러 명이 살다보니 즐거워야 할 수도원의 담화시간조차도 듣는 이보단 말하는 이만 많아서 ‘우리가 지금 무얼하는 거지? 도대체 듣는 이는 하나도 없고 말하는 이만 많이 있네?’ 하며 웃은 적도 있습니다. 제가 머물던 필리핀의 어느 봉쇄 수도원에서는 담화시간에 무슨 이야길 하고 싶으면 각자 손을 들고 잘 들어달라 부탁하면서 말하는 걸 보았다고 하니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웃었지만 어쩌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온전히 잘 듣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대화를 할 적엔 말하는 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의 깊게 듣기, 부탁받은 심부름을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 반복해서 되물어보기, 잊어버리지 않도록 메모하기, 미사 중의 강론이나 식당에서의 공동독서를 딴생각하지 않고 귀담아듣기 등등 몇 가지의 결심을 다시 해보는 오늘, ‘경청은 절제이며 겸손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이다’라는 격언을 되새겨 봅니다.

이해인 수녀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