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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유상철의 차이 나는 차이나] ‘중국으로 변할까’ 우려에 홍콩 시위는 반복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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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부여된 50년 고도자치 기간

홍콩은 ‘중국이 홍콩화 되기’ 바라나

현실은 대륙 영향력 홍콩 침투 가속

중국이 매력 국가로 변하지 않는 한

홍콩 시위는 계속 반복해 터질 전망

지난 6월 16일 홍콩인 200만을 거리로 불러낸 건 홍콩 정부가 추진하던 ‘범죄인 인도법’이었다. 여론에 밀린 케리 람 홍콩특구 장관은 결국 지난 9일 “법안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21일에도 케리 람의 하야 등을 외치며 계속 투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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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경찰이 지난 7일 몽콕 근처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나탄 로드에서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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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태는 끝나지 않았고 시위는 앞으로도 반복해 일어날 전망이다. 왜 그런가.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둘러싼 홍콩과 중국의 ‘진실 게임’이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중국화’와 ‘중국의 홍콩화’ 중 누가 진짜가 되느냐의 싸움이다.

97년 7월 1일을 기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시간이 가까워지자 홍콩엔 이민 바람이 불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한데 이런 홍콩인의 불안감을 잠재운 세 개의 단어가 있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항인치항(港人治港)’, 그리고 ‘고도자치(高度自治)’. 덩샤오핑(鄧小平)이 꺼낸 세 마디에 홍콩은 안정을 찾았다. 일국양제는 ‘한 나라 두 체제’로 풀이된다.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가 공존한다는 의미다.

덩이 79년 미·중 수교를 앞두고 대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며 만든 방안이다. 이를 홍콩에 먼저 적용해 대만의 믿음을 산다는 계산이었다. 홍콩 정치 원로 리주밍(李柱銘)은 “홍콩이 시범 케이스라 중국의 일국양제 약속이 잘 지켜질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항인치항’은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다. 중국이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홍콩 사람(港人)이 홍콩을 다스린다(治港)는 것이다. 홍콩특구 장관이나 입법회 의원 모두 홍콩인의 차지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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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정부가 추진하던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기 위해 지난 17일엔 홍콩의 노인들도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이전 시위에서 체포된 젊은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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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자치’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홍콩의 자치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약속만 잘 지켜지면 홍콩은 걱정할 게 없었다. 홍콩은 급격히 안정됐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늘 뒷골 당기는 문제가 있었다. ‘시한(時限)’이란 조건이 붙은 점이다.

고도자치의 시한을 ‘50년’으로 했다. 처음 합의 당시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서로에 유리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콩은 50년 후면 중국이 발전해 홍콩과 같은 민주사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중국의 홍콩화’다.

중국은 생각이 달랐다. 홍콩을 사회주의 제도로 동화시키는 데 50년 세월은 충분하다 여겼다. ‘홍콩의 중국화’다. 97년 이후 이제까지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바로 ‘홍콩의 중국화’와 ‘중국의 홍콩화’ 양자 간에 이뤄지는 밀고 당기기 게임이다.

자, 그렇다면 홍콩의 중국 회귀 22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떤가. 대륙에서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등장 이후 국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사회주의 제도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중국의 홍콩화’ 가능성과는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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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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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홍콩의 중국화’로 여겨질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홍콩인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게 바로 홍콩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배경이다. 홍콩이 중국으로 귀속된 지 5년 후인 2002년 첸치천(錢其琛) 중국 부총리의 발언이 시작을 알렸다.

첸은 홍콩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의 23조를 현실화할 때가 됐다고 했다. 23조는 “홍콩특구 스스로 법을 만들어 국가반역, 국가분열, 반란선동, 중앙정부 전복, 국가기밀 절취, 외국 정치단체의 홍콩 내 활동, 홍콩 정치단체의 외국 연계 등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중국은 홍콩이 반중(反中)기지가 되는 걸 막고자 했다. 이에 홍콩특구가 입법을 위한 자문 활동에 들어가자 홍콩인이 반발했다. 율정사(律政司) 국장 량아이스(梁愛詩)가 23조는 “당신 머리 위의 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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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곳곳에 '레논 벽'이 만들어져 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포스트잇이 붙여지고 있다. 레논 벽은 1980년대 체코가 공산국가였던 시절 자유를 열망하던 프라하 청년들이 반전과 평화를 노래했던 비틀즈 존 레논의 노랫말과 반정부 구호를 벽에 적으며 생겨났다. 사진은 지난 12일 홍콩 타이포 지역의 한 벽에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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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국가 안전’을 내세워 모든 홍콩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결국 홍콩 반환 6주년인 2003년 7월 1일 50만 홍콩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놀란 홍콩정부는 입법을 무기 연기했다. 이후 이렇다 할 시위는 없었다

그러나 ‘강한 리더’ 시진핑 집권 이후 상황이 확 변했다. 2014년 6월 10일 중국 국무원판공실이 “홍콩특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란 백서를 발표했다. 백서는 이제까지 홍콩의 안정을 가져온 일국양제와 항인치항, 고도자치란 세 개의 축을 한꺼번에 흔드는 것이었다.

백서는 ‘두 체제(兩制)’에 앞서 ‘한 나라(一國)’가 먼저라 강조했다. “홍콩특구의 고도자치는 중앙이 부여하는 만큼만 누릴 수 있고” 또 “중앙이 홍콩에 대한 전면적 관할권을 갖는다”고 했다.

리주밍은 백서를 중국이 홍콩에 대한 ‘항인치항’과 ‘고도자치’의 약속을 취소하는 첫걸음으로 평가했다. 홍콩 시사 평론가 린허리(林和立)는 “시진핑이 덩샤오핑의 뜻을 어겼고 ‘중영(中英)연합성명’이란 국제법의 정신도 위반했다”고 거칠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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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중국 국경과 인접한 홍콩의 성수이 지역에서 중국의 보따리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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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31일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특구장관과 입법회 구성 방법’을 통과시켰다. 당초 2017년엔 특구 장관을, 2020년엔 입법회 의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하게 돼 있었다. 한데 이를 무시하고 기존의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간선제일 경우 중국 정부는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람을 고를 수 있다. 선거위원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인물이 친중 인사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홍콩 민주파 사이에선 더는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없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그게 터진 게 2014년 ‘우산 혁명’이다. 그해 9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홍콩의 주요 지역인 중환(中環), 퉁뤄완(銅鑼灣) 등을 점령(occupy)하거나 행진하는 방식으로 우산 혁명에 참여한 홍콩인은 120만 명에 달했다.

우산 혁명이란 이름은 시위대가 경찰이 쏘는 물대포나 최루탄을 노란 우산으로 막은 데서 비롯됐다. 시위대는 보통선거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지만,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반면 ‘홍콩의 중국화’는 가속 페달을 밟는 듯했다.

2017년 홍콩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홍콩을 찾은 시진핑에게 중국의 홍콩주둔군은 “주시하오(主席好, 주석 안녕하십니까)”를 외쳤다. 과거 인사는 “서우장하오(首長好, 수장 안녕하십니까)”였다.

서우장하오는 사단장 이상 지도자에겐 누구나 할 수 있다. 주시하오는 국가 지도자한테만 하는 인사다. 시진핑에 대한 홍콩주둔군의 이 인사는 홍콩이 중국의 일부임을 강조하기 위해 실시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2018년 10월엔 8년 공사의 강주아오(港珠澳) 대교가 개통되며 홍콩은 중국의 고속철도 네트워크와 연결됐다. 홍콩역엔 이제 중국 철도 직원이 나와 검표에 참여한다. 리주밍은 이를 보고 “일국양제는 이제 일국일제가 됐다”고 탄식했다.

2019년 초엔 홍콩 경제권을 중국 광둥성 및 마카오와 연계시키는 웨강아오(粤港澳)대만구(大灣區) 프로젝트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홍콩인을 중국으로 송환할 수 있는 ‘범죄인 인도법’이 지난 4월부터 입법화 수순에 들어가며 홍콩인의 분노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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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홍콩 코우룬 지역에선 거리로 쏟아져 나온 홍콩인들이 고가차도까지 가득 메운채 홍콩정부가 추진하던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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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람은 “법안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홍콩인은 믿지 않는 모습이다. 2003년 폐기됐다는 기본법 23조도 잊을 만하면 다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중국 전인대에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2010년, 2011년, 2012년, 2017년 등 이미 네 차례나 있었다.

‘송환법’도 적당한 때 다시 거론될 수 있다고 홍콩인은 본다. 특히 중국이 조종하는 선거 기구에 의해 홍콩 장관이 뽑히는 한 홍콩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케리 람은 시진핑으로부터 ‘지불구이 사불피난(志不求易 事不避難)’의 8자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쉬움을 구하지 않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홍콩이 중국서 멀어지는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한 걸 높이 평가한 것이라 한다. ‘홍콩의 중국화’에 앞장서라는 격려에 다름 아니다.

홍콩인의 눈에는 중국이 ‘홍콩의 중국화’를 재촉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으로 비친다. 이를 ‘기대’가 아닌 ‘우려’로 생각하는 홍콩인의 불안한 마음이 오늘날 수많은 홍콩인을 거리의 시위에 동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결국 중국이 매력 국가로 변하지 않는 한 홍콩 시위는 반복해 일어날 전망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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