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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팀장칼럼] 반도체 소재 국산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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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모든 부품·소재를 자국에서만 조달하는 회사가 어딨나요. 애플만 해도 대만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TSMC에 핵심 부품인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제조를 맡기고,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은 한국 제품을 씁니다."

최근 만난 한 재계 관계자는 "일본 수출 규제 사태의 불똥이 규제의 피해자인 기업에 튀고 있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사태를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오히려 "왜 필수 소재를 국산화 안 했냐"는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반응을 보면 정말 그렇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 정책위원장은 지난 11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삼성전자가 지금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20년 동안 뭐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쏘아붙였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18일 "(국내) 중소기업도 (일본이 수출 규제한) 불화수소를 만들 수 있는데, 대기업이 중소기업 제품을 안 사준다"고 꼬집었다. 국산화 노력을 게을리해 위기를 자초했다는 뉘앙스다.

말은 쉽지만, 업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얘기다. 2017년 기준 국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18.2%, 소재 국산화율은 50.3%다. 국산화율이 90%에 이르는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미흡하지만,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소재는 첨단 화학 소재로 전자 부품과 달리 같은 성분일지라도 제조사별로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공정 단계가 복잡해 소재를 바꾸고 테스트하는 데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린다. 기본적으로 거래처를 쉽게 바꾸기 어려운 구조다.

특히 삼성전자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할 ‘화성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violet) 라인’은 불화아르곤(ArF) 광원을 사용하는 기존 공정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반도체를 생산한다. 라인 초기 투자 비용만 60억달러(약 7조원)가 들었고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EUV 전용 소재, EUV 전용 장비를 사용한다. 이 중 하나만 어긋나도 공정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품질 격차도 엄연히 존재한다. 국산 장비나 소재를 쓰고 싶어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8대 반도체 공정 중 식각(반도체 재료인 웨이퍼를 회로 부분만 남기고 녹이는 작업)공정에는 순도 99.999% 이상의 고순도 불화수소(HF, 에칭 가스)가 필요한데, 국내 업체 제품은 대부분 99.99% 이하다. 국산 제품으로 대체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삼성전자는 2014년부터 미국 반도체 소재 기업 ‘인프리아’에 투자하는 등 일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여러모로 모색해 왔다. 일본의 수출 규제 공식화 후 부랴부랴 대체 공급처 조사에 들어간 정부 관계자들보다 훨씬 앞서 미래를 준비해온 셈이다.

전 세계 200개 부품 업체와 거래하는 애플을 두고 "왜 국산화 안 하느냐"고 비난하는 미국 정부 인사를 보지 못했다. 반도체 장비·소재 국산화는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첨단 산업인 만큼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정부는 꾸준한 기초 과학 투자, 전폭적인 지원만 해주면 된다.

박원익 기자(wipar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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