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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세상읽기] 돌봄 경제의 얼굴을 한 산업정책 / 양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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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양난주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돌봄 경제 육성 방안을 묻는 자리에 불려갔다. 정부 문서에서 ‘돌봄 경제’라는 낱말을 보게 된 게 놀라웠다. 경제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내가 아는 한 ‘돌봄 경제’는 주류경제학을 비판하는 개념이자 경제를 새롭게 측정하고 해석하자는 대안적 접근법이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돌봄이라는 인간 활동이 우리 삶을 얼마나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지 그리고 역설적으로 인정과 보상에서 얼마나 배제되고 있는지 설명한다. 교환할 상품을 생산하는 인간의 활동만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계산하는 주류경제학의 관점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사랑과 친절, 이타심에 기초한 돌봄은 주변화되고 이를 주로 담당하는 여성들 역시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돌봄 경제라는 개념은 돌봄 노동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가치 평가에 기초하여 노동과 경제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자는 전복적인 발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2019년 우리나라에서 육성하겠다는 돌봄 경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고령화로 인해 증가하는 돌봄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관련 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어찌 이 세상 낱말에 단 하나의 의미만 있을 수 있겠는가. 백번 양보하여 돌봄 경제가 돌봄 관련 산업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일 수도 있겠지 생각하기로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돌봄 경제 육성’이 현재 내세울 정책목표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건 ‘사회서비스 산업화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한차례 시행한 정책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정부는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을 도입했다. 직접 이용자 신청을 받아 서비스 욕구를 기준으로 심사하여 수급 자격을 주고 바우처로 재정을 지원했다. 사회서비스 바우처는 이용자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쓰였다. 2007년부터 노인돌봄과 장애인 활동 지원, 산모·신생아 지원같이 방문하여 제공되는 재가서비스가 바우처 사업을 통해 확대되었다. 2008년에는 보육서비스도 덩달아 바우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바우처 도입을 계기로 개인에 대한 사회서비스에 대한 수급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의 사회서비스 보장은 정부가 인정하는 필요(시간)를 시간당 비용으로 지원하여 소비자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사회서비스 산업화 전략이란 바우처를 통한 재정 지원이 사회서비스 시장의 마중물이 되어 다수 공급자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가 증가하고 민간투자도 활성화된다는 구상이었다. 사회서비스의 질은 이용자의 선택을 두고 경쟁하는 공급자를 통해 저절로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사회서비스는 확대되었다. 수백만명의 이용자와 수만개의 사회서비스 공급 기관과 수십만명의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활동보조인 등 사회서비스 제공 인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딱 정부가 결정하는 수급자 규모만큼 시장 규모가 결정되고 정부가 지원하는 비용 아래로 임금이 결정되었다. 정부가 만들어준 소비자와 정부가 육성한 판매자의 거래로 이루어지는 사회서비스 시장은 선택과 경쟁을 통해 서비스 질을 높일 것이라는 정책 설계자의 기대에서 한참 어긋났다. 정부는 사회서비스 기관의 부당청구와 불법운영에 대한 단속을 점점 강화하게 되었다. 아동에 대한 안심 보육, 노인에 대한 존엄한 돌봄, 장애인의 생활 지원과 사회활동을 보장하는 사회서비스는 현실에서 멀어져갔다. 국가자격증을 가졌지만 시간제 호출근로로 최저임금에 맞춰진 시급노동을 하는 돌봄노동자의 불안정한 삶만큼이나 사회서비스 질도 불안정해졌다. 이것이 지난 10여년간 정부가 육성한 사회서비스 산업이고 돌봄 경제다.

돌봄 경제를 경제활성화에 기여할 아이템으로 호출하기에 앞서 정부는 현재의 돌봄서비스를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생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 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의 자격은 물론 보상, 대우, 지위 모든 것이 지금과 달라져야 한다.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감소, 기술혁명과 같은 이 모든 변화는 우리 사회에 도래할 돌봄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돌봄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렇다면 돌봄 노동에 대한 가치를 사회경제적으로 인정하고 이 가치 있는 일에 모두의 시간을 나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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