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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강성민의명저큐레이션] 지난 시대의 메신저,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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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더 강한 사랑으로 묶어준 매개체 / 이젠 SNS로 대체… 기다림·간절함도 덜해

세계일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죠.”(존 버거의 ‘A가 X에게’ 92쪽)

한때 모든 연애가 편지를 매개로 했던 적이 있다.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포기할 무렵 거짓말처럼 도착해 있는 편지를 보고, 혼자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그 편지를 가져가면서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봉투에 적힌 단정한 이름, 편지지를 접은 모양, 볼펜의 종류, 보일 듯 말 듯한 어떤 얼룩, 편지는 글만 읽는 게 아니라 얼룩까지도 읽게 했다.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는 편지소설이다. 아이다(A)라는 여인이 이중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복역 중인 애인 사비에르(X)에게 보낸 편지로 이뤄져 있다. 이중종신형이란 종신형이 두 번 선고된 것으로, 살아서는 담 밖을 나올 수 없는 무서운 형벌이다. 아이다는 사비에르와 혼인을 하지 않아 면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생이별을 하게 된 이런 상황에서 편지는 시작된다.

아이다의 직업은 약제사다. 사비에르와 같은 비밀 저항조직의 일원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아이다는 약국을 찾아온 환자와의 에피소드나 집과 직장을 오가면서 보고 들은 일을 사비에르에게 말해준다. 사비에르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당연히 알 수 있었을 일들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과일장수가 손으로 과일의 무게를 재어내듯, 그녀는 매일의 일상을 편지로 씀으로써 사비에르의 부재함을 지워내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이 책에 표현된 애인을 향한 애인의 친밀감은 절제돼 있으면서도 농밀하다. 어느 날 아이다는 편지 말미에 볼펜을 쥔 자신의 손을 그려서 보낸다. 당신을 만지지 못한 지 너무나 오래돼 쓸모없어진 것처럼 보이는 손이라고 그 밑에 적는다. 또 다른 날은 다리가 부러진 의자를 고쳤다가 일일이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고 접착제를 발라주었다. 그녀는 그렇게 고쳐진 의자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펑펑 운다. 접착제가 마르는 이틀 동안 그녀는 자신이 왜 울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는 부서진 의자를 고쳐 달라고 할 사람이 옆에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편지에 쓴다. 그녀는 매일 밤 사비에르를 뼈마디 하나까지 조각조각 맞춰보며 그의 부재를 살아낸다.

어릴 때 다 마신 요구르트병 두 개를 실로 이어 한쪽은 요구르트병에 입을 대고 말하고, 다른 쪽은 요구르트병에 귀를 대고 듣는 놀이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 멀리서 말해도 가까이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울려 머릿속으로 파문이 돼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편지소설을 읽는 내내 아이다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메신저는 즉각적이다. 이는 편지가 다른 메신저와 갖는 결정적 차이다. 편지는 쓸 때부터 상대에게 닿을 때까지 오랜 시간 거기 얽매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와 더욱 강한 인연으로 묶인다. 어떤 편지는 마치 그 편지를 제외한 이 세상 전부를 괄호로 묶어버리는 것과도 같은 신기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편지는 이제 지난 시대의 메신저다. 당연히 우리가 아는 기다림과 간절함의 일부도 편지를 따라 지난 시대에 속하게 됐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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