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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매경포럼] 의뢰인 `고해성사`까지 엿듣는 국가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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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어느 날 가톨릭 신도가 평소 믿고 따르던 사제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하는데 누군가 엿듣는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이런 행동에 분개하며 드잡이까지 할지 모른다. 개인이 간직한 고민과 비밀을 염탐해 빼내는 비양심적인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와 비슷한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 검찰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서슬 퍼런 권력기관들이 사건 의뢰인과 변호사가 주고받은 상담 내용과 법률 조언을 압수수색이나 임의제출을 통해 강제로 확보하는 행태가 그렇다. 검찰만 해도 올 2월 가습기 살균제 판매사인 애경산업의 내부 자료 확보 명목으로 최대 로펌인 김앤장을 압수수색했다. 작년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필요하다"며 태평양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했고, 2016년 롯데 탈세 수사 때는 율촌의 사무실을 뒤졌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지난 4일 대한변협(회장 이찬희)이 소속 변호사 20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더 충격적이다. 변호사 중 34.5%가 "수사기관이 피의자 사무실·컴퓨터·휴대폰을 압수수색해 변호사와의 대화를 증거로 수집했다"고 밝혔고, 32.8%는 "수사기관이 변호사 사무실·컴퓨터·휴대폰까지 압수수색했다"고 답했다. 한 변호사는 "내가 변호를 맡은 피고인을 구치소에서 접견한 날 검찰이 '상담 내용을 밝히지 않으면 피고인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하더라"고 했다.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비밀유지권을 보호해줄 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 변호사법·형사소송법 등에는 변호사가 의뢰인의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의뢰인 관련 자료 압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명시돼 있긴 하다. 하지만 의뢰인 동의나 중대한 공익상 필요 등이 있을 때는 자료를 수사기관에 내야 한다는 예외 조항이 있다. 이러다 보니 수사기관이 사건을 조사하다 난관에 부딪히면 '비리 척결' '사회 정의' 등 공익을 내세워 변호사를 통해 증거를 수집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한 중진 변호사는 "검찰이 수사 편의주의에 젖어 피의자 정보를 훤히 알고 있는 로펌과 변호사를 협박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비밀유지권이 훼손되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변호사 조력을 받을 권리'가 무너질 우려가 크다. 변호사 사무실이 수사 타깃이 되면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흉금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되고 변호사도 정확한 정보에 따라 적절한 법적 조언이나 각종 리스크에 따른 전략을 짤 수 없게 된다. 방어권이 산산조각 나는 셈이다. 한애라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런 일이 계속되면 국민이나 기업들이 변호사의 법적 조언 없이 사업을 강행하는 것이 변호사에게 자문했다가 나중에 압수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결국 사회의 전반적인 준법 수준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별건 수사가 이뤄지거나 피의자가 약점이 잡혀 허위 자백을 하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진국에선 변호사와 의뢰인 간 비밀유지권이 명문화돼 있다. 미국은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와 별개로 '변호사-의뢰인 특권(Attorney-Client Privilege)'이 인정돼 의뢰인과 변호사 간 상담 내용이 모두 보호를 받는다. 압수수색으로 입수한 문서도 법원이 임명한 특별집행관(Special Master)이 봉인해 법원이 허가해야 볼 수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도 비밀유지권에 대해 엄격하다.

수사를 통한 비리 척결과 정의 실현은 매우 중요하다. "피의자가 증거자료를 변호사에게 맡기고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수사기관의 항변 또한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의뢰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국민의 기본권까지 무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지적처럼, 국가 권력이 공동선을 내세워 자의적 개입을 하면 사회는 미끄러운 비탈에 빠지게 된다. 변호인 조력권과 방어권은 '인간의 박탈할 수 없는 권리(inviolable right of man)'이자, 법률에 어두운 의뢰인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자위권이다. 의뢰인과 변호사 간에 비밀리에 오간 내용이 수사기관에 노출되는 순간 의뢰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해 율사 출신 여야 정치인들이 비밀유지권 입법을 위해 나선 것도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수사 편의를 위해 의뢰인의 고해성사까지 엿듣는 나라는 결코 정상적인 국가라 할 수 없다.

[박정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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