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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기자수첩] 국가가 보호 약속한 日총영사관… 그곳에 들어간 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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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일본총영사관 마당에 대학생 6명 무단침입해 시위

외국공관은 국제법상 보호받는 곳… 해외의 우리 공관이 안전해야하듯 국내 외국공관도 안전 보장해줘야

조선일보

박주영 부산본부장


22일 부산 동구 초량동 일본총영사관 마당에 대학생들이 무단 침입해 일본의 수출 규제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A(21)씨 등 6명으로 이뤄진 시위대는 자신들을 '반일행동 부산청년학생 실천단' 소속이라고 밝혔다. 이 단체는 지역 대학생과 청년을 중심으로 지난 10일쯤 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일본영사관 내부 도서관에 있다가 갑자기 영사관 마당으로 뛰어나와 10분여 동안 일본을 규탄한다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구호를 외쳤다. 플래카드에는 '일본의 재침 야욕 규탄한다' '경제 도발 규탄한다' '아베는 사죄하라'는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들은 앞서 이날 오전 11시쯤 신분증을 내고 출입증을 받아 도서관에 들어가 있었다.

이들이 영사관 마당에서 시위할 무렵 영사관 후문에선 민노총 등이 주도하는 '적폐청산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이하 적폐청산 부산본부)' 등 30여개 단체 회원들이 "일본 경제 보복에 항의하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기자회견을 했다. 영사관 안 시위대의 구호가 들리자 밖에 있던 기자회견 참가자들도 "일본은 사죄하라"며 맞장구 구호를 외쳤다. 민노총 부산본부장이 대표로 있는 적폐청산 부산본부는 민노총, 부산대학생겨레하나, 전교조 부산본부 등 지역 단체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 4월 일본영사관 인근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도 주도했다.

이날 건물 안팎에서 반일 구호가 울려 퍼지면서 일본영사관 측은 종일 긴장 상태였다. 학생들이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일본영사관은 외국 공관이다. '외교, 영사 관계에 관한 빈 협약'에 따라 불가침권이 인정된다. 불가침권은 공관이 소재한 나라의 어떠한 사람도 공관장의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다. 협약은 공관이 주재하는 곳의 국가는 불가침권을 옹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 공관이 외국에서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듯, 국내의 외국 공사관도 안전을 보장해줘야 한다. 학생들의 일본영사관 무단 침입과 시위는 국제법에도 명기된 이 같은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일본영사관 내 반일 시위는 청와대 참모와 정치인들이 '죽창가' 등을 언급하며 '친일 대 반일' '애국 대 이적'의 구도를 부추기는 가운데 일어났다. 일부 여당 정치인은 "이웃 사촌보다 이웃 원수였던 그 과거를 잊지 말자"고 나서고 다른 여당 정치인은 "아베의 경제 보복 진짜 의도는 문재인 정부 탄핵 유도"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관제(官製) 반일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적폐청산 부산본부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독려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극단적 형태로 치닫고 있다. 최근 일본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의 한 매장에서 선반에 쌓아 놓은 옷에 붉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달아난 사람이 있었다. 매장 담당자가 방범카메라 영상으로 범인을 잡았으나 경찰에 신고할 경우 문제가 커질 것을 우려해 그만뒀다고 한다. 유니클로의 한 지방 매장 앞에선 일부 시민단체 회원들이 '방사능 물질로 만든 옷'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며 고객들의 매장 입장을 막았다. 일부 네티즌은 '유니클로 매장 순찰대'를 자처하며 인근 유니클로 매장을 찾아 손님이 없는 사진을 올리면서 '이상 무(無)' 또는 '파리만 날리고 있음' 등의 멘트를 남기고 있다.

소비자 주권의 건강한 표현이어야 할 불매운동이 이처럼 선동적 마녀사냥으로 치닫게 되면 관제 민족주의의 한계까지 넘어설 수 있다. 국제법에 규정된 외국 공관 불가침권을 이번처럼 쉽게 침범한다면 한순간에 외국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청와대 참모가 선창(先唱)한 '죽창가'를 학생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하면 종국엔 한국이 국제사회의 갈라파고스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박주영 부산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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