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송혜진의 영화를 맛보다] "얘야, 방문은 10㎝만 열어다오" 아빠의 달콤하고 소심한 부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기묘한 이야기'의 와플

조선일보

부모 마음은 모순투성이다. 콩나물처럼 자란 아이를 보면 배꼽부터 간질간질 웃음이 올라오지만, 아이가 짐짓 어른처럼 행동하면 가슴 한편이 슬쩍 내려앉는다. '언제 컸나' 싶고 '그만 컸으면' 싶다. 더는 아이가 내 무릎에 앉아 TV를 보지 않게 될 때, 친구와 전화한다고 방문을 닫을 때, '짜식…' 하다가도 그림자처럼 쓸쓸해지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상무도 비슷한 하소연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의 잠든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찰칵' 찍었는데, 아이가 그 소리에 일어나 이랬단다. "아빠, 방금 나 찍었어? 그거 초상권 침해야!" 그는 "아이의 쌀쌀한 말투에 서럽다가도 내 새끼 입에서 '초상권'이란 어려운 말이 나오니 또 좋더라"고 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하는 '기묘한 이야기' 시즌3도 이런 부모 마음을 그린다. 미 인디애나주 호킨스의 경찰서장인 짐 호퍼(데이비드 하버)는 초능력을 지닌 여자아이 일레븐(밀리 바비 브라운)과 우연히 만나 미지의 괴생명체와 싸운다. 폭풍 같은 전투가 끝나고 호퍼는 일레븐을 딸로 삼는다. 비밀 기관의 실험실에 갇혀 자란 일레븐은 뒤늦게 또래 친구들과 호퍼를 만나면서 보통의 삶을 누리게 된다. 그 무렵 맛본 것이 바로 와플이다. 초콜릿 칩이 촘촘히 박힌 냉동 와플! 요리 못하는 아빠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 일레븐과 호퍼는 종종 와플을 산처럼 쌓아놓고 함께 먹는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고 남자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말이다.

딸아이가 남자 친구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걸기 시작하자 호퍼는 애태우는 맘으로 편지를 쓴다. '너랑 보드게임 하던 게 그립고, 3단 와플 만들던 것도, 서부영화를 함께 보던 것도 그리워. 순진한 생각인 것 안다. 삶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계속 자라다오. 자라고 실수하고 배우렴…. (중략) 하지만 괜찮다면 불쌍한 네 아빠를 생각해서, 방문은 10㎝만 열어놔라.' 일레븐은 이 편지를 읽으며 울고 웃는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아이와 와플을 많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간 나 역시 이런 편지를 쓸 날이 올 테니까. 함께 나눈 달콤하고 바삭한 와플 맛의 기억이 그래도 닫힌 방문을 살짝은 열리게 할 테니까.

[송혜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