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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기고] 자사고 논란 본질은 '법정주의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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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하윤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전주 상산고 등 자사고들의 잇따른 지정 취소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학부모와 일반 시민들까지 불공정, 불공평, 불법적인 평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해당 자사고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예고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5년간의 학교 운영을 평가한다면서 평가 직전에야 사전 협의도 없이 자사고에 불리한 평가 지표, 배점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공정성을 결여한 것이다. 타 시·도와 달리 재지정 기준 점수를 종전보다 20점이나 올린 전북은 형평성마저 저버렸다.

이런 시·도 교육청들의 평가 과정을 보면, 애당초 자사고를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하도록 지원하려는 것이 아닌, 폐지 의도를 갖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최종 결정 권한을 가진 교육부가 '자사고 평가는 교육감 권한'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교육에 대한 국가 책임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자사고 존폐 논란의 근본 원인은 단순히 몇몇 자사고의 평가 절차가 잘못된 것을 넘어서서, 국가의 고교 체제가 정치와 선거에 좌우되고 있는 데 있다.

현재 자사고·특목고 같은 고교의 종류는 초중등교육법이 아닌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고, 심지어 시행령에 따르면 교육감이 5년마다 자사고를 평가해 지정 취소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헌법 제31조 제6항은 '학교 교육 및 평생교육을 포함한 교육 제도와 그 운영, 교육 재정 및 교원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최근 헌법재판소도 자사고 관련 혼란이 벌어지는 것이 고교 종류와 신입생 선발 시기가 법률이 아닌 시행령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법률에 규정하는 것이 교육 제도 법정주의에 더 부합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서 현재 국회에는 교육감이 평가를 통해 자사고를 임의로 지정 취소할 수 없게 하고, 중대한 법령 위반 행위가 없으면 존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국회는 헌법과 헌재 의견에 따라 법을 하루속히 개정해야 한다.

일본 등 선진국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학교 다양화'와 '수월성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선진국 추세를 보면 자사고를 없앨 게 아니라 설립 취지를 살려 잘 운영되도록 더욱 지원하고 육성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권과 교육감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자사고를 특권학교, 귀족학교, 입시 사관학교로 몰아붙여 일방적으로 폐지하려는 것은 교육 정책을 이념화하고 교육법정주의를 훼손하는 행위다.

교육의 다양화와 기회 확대, 질 높은 교육 추구는 실종되고, 평준화 교육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 정부는 아이들이 저마다 노력한 만큼 행복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학벌주의와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데 더욱 매진해야 한다.

앞으로 자사고 등 고교 체제는 수월성 교육을 포함해 학생에게 다양한 길을 열어줄 수 있는지,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미래 교육 환경에 부합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국가적 검토와 국민적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하윤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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