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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숨 막히는 유독가스, 청년들 현실도 빗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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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개봉 한국형 재난영화 ‘엑시트’ 이상근 감독

급박함보다는 느린 것, 특수한 사람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쓰레기봉투 의상·세트도 재미…구상한 지 7년 만에 만든 첫 장편

경향신문

<엑시트>는 스포츠클라이밍 동아리 출신인 대학 선후배가 유독가스가 퍼져 아수라장이 된 도심을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상근 감독은 “관객들이 기대하고 기다려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저 감독 영화는 뭔가 특별함이 있지만 익숙함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다.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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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극한 재난상황. 이를 극복해가는 인물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는 할리우드는 물론 국내에서도 그동안 많이 선보였다. 오는 31일 또 하나의 재난영화 <엑시트>가 개봉한다. <엑시트>는 기존에 봐왔던 재난영화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한국적 소재는 물론 한국 특유의 정서가 가득한 ‘진짜 한국형’ 재난영화라 할 수 있다.

<엑시트>는 이상근 감독(41)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영화 곳곳에는 유독가스 등 기존 재난영화와 차별화하려는 신인 감독의 재기발랄함이 담겨 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재난영화에서 어떤 재난인지가 중요한데 용암이나 쓰나미 같은 급박한 것보다는 다소 느리지만, 익숙한 공간도 공포의 대상으로 바꾸는 유독가스라면 신선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도 초인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아니다.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가족들의 핀잔과 구박으로 집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사는 청년 구직자고, 의주(임윤아)는 돌·회갑 잔치 전문 소규모 컨벤션센터에서 일하는 고용이 불안정한 사회초년생이다. 이 감독은 “재난은 특수한 사람들만 겪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 순간을 타개하면 극적인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호흡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 방식이다. 유독가스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과 호흡을 못하는 상황을 가져온다. 청년들의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은 창작자 욕심도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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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의 한 장면. 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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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남과 의주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다소 특이한 능력은 있다. 대학 동아리 활동으로 익힌 암벽 등반(스포츠클라이밍)이다. 주인공들은 한국 특유의 미(?)로 꼽히는 상가 간판 등을 발판 삼아 확산되는 유독가스를 아슬아슬하게 극복해간다. 이 감독은 “평범한 인물에게 어떤 능력을 부여할지 다양하게 생각했다. 무술적인 능력보다 밥벌이에는 도움이 안될지라도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 자기가 좋아했던 취미를 활용하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컨벤션 건물 벽에 있는, 평소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요철·장식들은 주인공들이 상황을 극복하는 데 주요한 도구가 된다. 생계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스포츠클라이밍이 상황 극복에 주요한 능력이 되는 것과도 맞닿는 지점이다. 이 감독은 “많은 분들이 컨벤션 건물의 유치한 형상에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저런 걸 만들어 놨을까’ ‘어울리지 않는다’ 느낌도 든다. 벽에 붙은 물건이 용남이 루트를 개척하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재밌는 액션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주인공들은 극한 상황 속 생존 본능, 이기심이 꿈틀대지만 영웅적인 면모도 보인다. 다만 히어로들이 입는 멋진 ‘쫄쫄이’ 스판덱스 대신 쓰레기봉투를 입고, 성능 좋은 조명탄 대신 놀이용 마그네슘봉을 흔든다. 이 감독은 “주변에 흔한 사물들을 평소 쓰임새와 다르게 쓰면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런 아이디어를 많이 내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약 1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액션영화지만, 스펙터클이나 ‘멋짐’보다는 ‘짠내’가 강하게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감독은 “2012년 이 영화를 구상했다. (신인인 나로서) 당시에는 저예산 영화가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초반 설정도 어머니 칠순 잔치가 아닌 결혼 피로연이었다. 피로연 중 유독가스가 퍼지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설정했다. 유독가스로 정한 데는 저예산이라 (세트·소품 등) 미술을 많이 못해서 가려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러다 제작사와 기획·개발 단계에서 대중적인 가족드라마로 설정과 캐릭터를 바꿨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영상학과를 졸업한 이 감독은 본격적으로 영화 연출을 하기 위해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시절 그가 만든 단편영화들은 미장센단편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러나 장편 감독으로 데뷔하기에는 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는 “단련의 시간이 누구한테나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딱히 고생하고 힘든 시간은 아니었다. 다만 이 영화가 언제 구체화되고 실현될까 하는 뿌옇고 막연한 혼란스러움은 있었다”고 했다.

이 감독에게 주인공들의 스포츠클라이밍 같은, 남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자신 있는 능력이 뭔지 물었다. 그는 “사실 아무짝에 쓸모없고 남에게 도움 주는 건 아니지만 다소 힘들어도 ‘참는 것’을 잘하는 것 같다. 그게 지난 7년의 과정과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여정을 버티게 해준 제 필살기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쇼생크 탈출>을 ‘인생 영화’로 꼽은 이 감독에게 <엑시트>가 ‘무명 단편영화 감독’을 벗어나게 해줄 탈출구가 될지 주목된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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