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2 (목)

[공감]들리던 소리가 들리지 않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학입학을 앞두고 학생회에서 주관한 새내기 새로배움터에 참가했을 때다. ‘문선’이라 불리던 율동을 따라 하라 해서 숨고 싶었고, 자꾸 일어나 노래하라 시켜서 울고 싶었다. 2학년 선배들이 야심차게 준비해온 연극은 급조한 티가 너무 났다. 처음 마셔본 맥주는 보리차 맛이었고, 막걸리라는 술은 식감이 상한 요구르트 같아 싫었다. 어서 일정이 끝나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둘째 날 밤, 마지막 순서로 준비된 풍물패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향신문

꽹과리를 앞세운 풍물패는 우리를 전부 이끌고 야외공터로 나갔다. 흥겨운 농악연주에 이어 오북놀이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2월 말의 얼음 같은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둥글게 모여든 다섯 개의 북이 일제히 머리 위로 들려져 둥둥둥 하던 순간 심장이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던 느낌이 지금도 기억난다. 카리스마 있는 꽹과리보다, 장중한 징보다, 새침한 장구보다 나는 북이 더 좋았다. 낮고 굵게 울리는 북소리가 참말로 좋았다.

개강하고 몇 주 지나 동아리 가입 시즌이 되었다. 당시 단과대 소속 소모임을 학회라 불렀는데, 선배들이 저마다 학회에 가입하라며 밥도 사주고 매점에서 빵이나 우유도 사주고 그랬다.

내 경우 학생식당 밥이 아닌 돈가스나 철판볶음밥도 종종 얻어먹곤 했는데, 당시 나와 교양수업을 함께 듣던 단짝 때문이었다. ‘소공녀’라는 별명을 지닌, 얼굴이 눈송이처럼 하얀 친구였다. 선배들은 다들 소공녀를 본인 학회에 들어오게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한참 설명하고 설득한 다음,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엉거주춤 서 있던 내게도 무얼 하고 싶은지 묻곤 했다.

“풍물패요.” 나는 답했다. 북을 배우고 싶다고, 커다란 북이 머리 위에서 둥둥둥 할 때 심장이 뛰었노라고 말이다. 그러자 얼굴 긴 선배가 “모르긴 몰라도 북은 무거워서 여학우들이 들기 어려울 텐데…” 하는 것 아닌가? 옆에서 얼굴 동그란 선배도 여학생들은 대개 꽹과리나 장구를 치더라며, 북이나 징을 드는 경우는 못 봤다고 했다. 꼭 북을 치고 싶다며 시무룩해진 채 있던 나는 듣고 말았다. 학회실 구석 낡은 소파에 파묻혀 담배를 훅훅 피우던 복학생 선배가 피식 웃으며 혼잣말하는 걸 말이다. “꽹과리만 한 쪼끄만 계집애가 북은 무슨?” ‘꽹과리만 한 계집애’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상해서 풍물패 대신 단과대 학보사에 들어갔지만, 스무살로 돌아가 배우고 싶은 걸 하나만 고르라면 여전히 북이다.

대학원생이 된 후에도 교내에서 풍물 연주를 들을 때면 그때껏 내가 학교 울타리에 남아 있어 좋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해질 무렵이면 교정의 수풀 속에서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울리곤 하였고, 간혹 운 좋으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풍물패 정기공연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소규모 공연의 관객은 대개 그 동아리 선배들인지라, 지나가던 누군가 “얼쑤” 추임새를 넣으며 계속 서서 듣기는 아무래도 민망했다. 다른 볼 일이 있는 양 괜스레 그 앞을 수차례 오가며 슬쩍슬쩍 귀동냥하곤 했다.

어느 초여름 토요일 밤, 선후배들과 저녁 먹으러 나가다 학생회관 앞마당에서 북과 쇠를 두드리는 학생들을 보았다. 우리가 식사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도 여전히 거기 모여 악기를 치고 있었다. 다들 한껏 흥이 오른 듯했다. 교내 보안경비업체의 눈을 용케 피해 조그만 모닥불까지 피워 두었다.

일행더러 먼저 들어가라 하고 나는 그곳에 홀로 남았다. 캄캄한 밤 모닥불이 훨훨 타오르고, 흥이 난 친구들은 북을 두들기며 펄쩍펄쩍 하늘까지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던 그 순간. 귀퉁이에서 훔쳐만 보면서도 나는 내가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모교를 방문해도 풍물 연습하는 소리를 듣기 어려워졌다. 내가 재직하는 대학 교정에서 역시 아직 한 번도 못 들어보았다. 이제는 방음처리된 동아리방 안에서만 연주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물놀이 자체가 더 이상 학생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두둑두둑 빗소리 듣는 날이면 두둥두둥 북소리가 그리워진다. “들리던 소리도 들리지 않네. 그 어디서 울리고 있을까.”(노래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중에서)

이소영 |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