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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은미희의동행]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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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회가 됐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요술 거울 속에 숨으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소거해버린 것이다.

얼마 전 다시 꺼내본 ‘동주’라는 영화는 ‘부끄러움’을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영화 속에서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들은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정말, 이 복잡한 현실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네 탓’만이 난무할 뿐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그리하지 못할 일이다. 맹자는 도덕의 근간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들었다. 수오지심은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옳지 못함을 미워한다는 말인데, 주희는 한 발 더 나아가 수오지심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아닌 금수라고 했다.

하긴 인간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갖게 된 감정이 부끄러움이었으니,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사람됨의 일차적 윤리 잣대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윤리를 안다는 뜻으로 의역할 수 있고, 그런 까닭에 부끄러움은 곧잘 문학의 단골소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에 대한 자세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의 부끄러움은 아마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저버릴 때 자신은 어쩌지 못하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부채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까닭에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는 나아가 쉽게 쓰이는 시조차 부끄러워했고,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고 고백했으니, 그의 삶에 대한 순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독립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마루타로 짧은 일생을 마감한다. 그 생체실험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던 그의 혈관은 생리식염수로 채워지고 스물아홉 살에 이승의 삶을 마쳤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 비장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가 살면서 늘 부끄러움을 경계했듯, 부끄러움은 스스로를 반추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며 그 어떤 감정보다도 성숙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부끄러움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렸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개선의 여지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내로남불에서 벗어나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고, 책임지는 자세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난마처럼 얽힌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윤동주 시인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 그동안 잃어버렸던 부끄러움을 되찾고 건강한 세상을 꿈꾸자.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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