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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유종일 “문재인 정부의 남은 3년, 50조원씩 지출 늘려 ‘사람’에게 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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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KDI 대학원장한국 경제를 진단하다

경향신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이 지난 29일 세종시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정부가 재정지출을 대폭 늘려 교육과 복지, 기후변화 대응에 투자해야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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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국의 산업 취약점 드러나

검증된 방식만 빠르게 좇는

단기적 성과주의가 원인

한국은 이미 자본축적 많아

기업은 시장경쟁에 내맡기고

교육과 복지에 예산을 쏟아

사람이 망하지 않도록 해야


대표적 진보성향 경제학자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장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에 전면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 임기가 절반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새삼 ‘전환’을 주문하는 이유는 세계질서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의 대응은 과거 방식으로, 단기적 시야에만 머물러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유 원장은 “지난 20년 동안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져왔다. 저출산은 갈수록 심화되고, 기업들은 규제 때문이 아니라 인재가 부족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 전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해서도 “단기적인 성과주의에 매몰돼 설계역량이 부족하다는 한국 경제의 취약점을 드러낸 일인데, 여전히 단기적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기업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늘리는 등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대로라면 피로감만 쌓일 뿐 경제가 안으로부터 무너질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유 원장은 “현 정부는 아직 세 차례나 예산안 편성 기회가 있다”며 “앞으로 3년 동안 해마다 당초 정부지출 계획에서 50조원씩 더 늘려 교육과 복지, 기후변화 대응에 투자하는 ‘전환적 뉴딜’을 통해 역량 중심의 성장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질서가 급변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장기적이고 과감한 투자는 정부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원장은 재정건전성 악화를 우려하는 시각에 대해 “지금 투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미래세대에게 무책임한 일”이라며 “정부가 3년간 적자를 감당하며 알차게 투자한다면 10~15년 후에는 성장률이 높아져 국가채무 등 재정건전성 문제도 효과적으로 대응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를 거쳐 1998년부터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동반성장 등 경제정책을 자문했다. 지난해 6월 KDI 국제정책대학원장으로 취임했다.

인터뷰는 지난 29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가 가장 큰 현안이 됐다. 지금 한국 경제상황을 평가하면.

“일본의 수출규제로 드러난 사실은 한국 경제·산업구조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산업의 비중이 어마어마하고, 반도체 경기에 한국 경제 전체가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 정부도 이 점을 계산하고 행동에 옮긴 것이다. 검증된 방식을 빠르게 좇아서 성과를 내려 하는 ‘단기적 성과주의’가 이런 취약점을 만들어낸 원인이다.”

- 단기적 성과주의는 한국 경제가 성장한 힘이기도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 기업에 설계능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 부품·소재산업에서 뒤처진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수출규제 대상이 된 고순도 불화수소만 하더라도 8년 전 한 중소기업이 어느 정도 순도 높은 불화수소를 개발했는데 반도체 대기업이 함께 노력해 품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2001년 당시 이종호 원광대 교수 연구팀이 3차원 반도체 기술을 개발해 삼성전자를 찾아갔지만 삼성전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기술은 인텔에 팔렸고, 인텔은 2011년 세계 최초로 3차원 반도체를 생산해냈다.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것을 하지 않고 검증된 방식을 선택하고 추격해 성장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교육도 여기에 맞춰 문제유형을 빠르게 익히고 주어진 정답을 맞히는 형태에 최적화돼 있다. 이제는 고도성장기도 아니고 더 이상 이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수출규제 때문에 단기적 성과주의가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을 둘러싼 기술패권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 같은 방식 때문에 한국의 경쟁력은 더욱 떨어지고 있다. 모험을 하지 않다 보니 신기술은 개발이 안되고, 기업들은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인재들은 해외로 떠난다. 단기적 성과주의로 인해 이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문제의 대응마저 단기 성과주의에 매몰돼 있다.”

- 수출규제 조치로 당장 기업이 피해를 보면 고용·소비 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상황이 급변하는데 정부의 단기적인 대응도 중요한 것 아닌가.

“과거에는 통했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방식이다. 정부는 사람은 지원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기업은 시장경쟁에 내맡겨야 한다. 잘하는 기업은 쭉쭉 성장하고 경쟁력 없는 기업은 빨리 망하게 해야 한다. 기업이 망해도 사람은 망하지 않도록 교육과 복지에 예산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기업을 우선 지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국민경제에서 투자 비율이 한국만큼 높은 국가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투자를 통해 거둘 수 있는 효과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자본축적이 많이 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공정한 시장질서를 만들어 경쟁에 내맡기고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사람의 역량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는 수출규제를 빌미로 기업의 규제완화 요구를 들어주고, 여권 인사는 ‘수출하는 기업이 슈퍼애국자’라며 치켜세운다. 이런 것 역시 전형적인 단기 성과주의적 접근이다. 이런 행동들이 장기적으로는 혁신 부진과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

-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나.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의 대전환을 선언해야 한다. 2017년 5월에 설정한 국정과제를 변화된 여건에 맞춰 다시 짜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20년째 잠재성장률(한 나라의 자본과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 가능한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 분야 경쟁력이 하락하고 있다. 개별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다.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정책으로 국정과제를 전환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지출부터 늘리고 다시 짜야 한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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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사람중심 경제’

방향은 옳았지만 준비 부족

사람을 키우는 과감한 투자로

국정과제의 대전환 선언하길

미래세대 부담 걱정하지만

지금 투자 않는 게 더 무책임

국민 역량 키울 평생교육과

저출생 해결에 돈을 쏟아야


-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사람중심 경제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지만 평가가 좋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하면서 ‘사람중심 경제’로 전환한다고 선언했고 방향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국정과제를 실현할 구체적 정책 프로그램은 충분히 숙고된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대선이었고 준비기간이 짧았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소득주도성장은 분배란 말을 꺼내기 부담스러워 성장론으로 제시했지만 사실상 분배정책이었고 필요한 정책이었는데, 교과서대로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기 전에 재정지출을 충분히 늘려 2017년도 예산에서 근로장려금 확대 등이 들어갔어야 한다. 2018년도 예산도 통합재정수지 흑자가 30조원을 넘는 등 충분히 확장적이지 않았다. 혁신성장도 8대 선도산업, 12대 선도산업 이런 식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기업에 지원한다. 최근에는 소재·부품산업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런 방식은 역대 모든 정부가 해왔다. 미래 설계역량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과감한 투자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세계질서가 급변하고 있고 이런 환경에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건 올해 들어 특히 불거진 문제이다. 이 점에서도 전환을 다시 고민해야 할 때이다.”

-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가까이 지나갔으며 내년 총선이 있다. ‘전환’이 가능할까.

“3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 정권이 예산안을 3번 더 만든다. 물론 올해 예산은 이미 상당 부분 준비돼 있겠지만 그래서 걱정된다. 정말 제대로 된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 이 3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권이 국정과제를 다시 짜면서 자기성찰과 미래기획을 해야 한다.”

- 올해 세제개편안으로 향후 5년간 5000억원가량 세수 감소가 예상된다. 기업 실적 부진으로 내년과 후년의 세수상황은 정말 좋지 않다고 한다.

“지금 투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미래세대에게 무책임한 일이다.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을 2.2%로 전망했다. 성장률이 둔화된 상황에서 세수는 분명 줄어든다. 기업과 가계 모두 수입이 감소하니까 돈을 아껴 써야겠다고 판단하는 시점이다. 전반적인 지출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정부가 같이 돈을 아낀다면 악순환이 벌어진다.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재정을 풀어야 한다. 더구나 세계질서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전환에 돈을 쓸 수 있는 주체는 정부밖에 없다. 뭔가 문제가 있어 잠재성장률이 내려가는 건데 지금 안 바꾸면 미래세대가 더 힘들어진다. 물론 무작정 지출을 늘려서 될 일은 아니고, 정부가 돈을 쓸 때 미래세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느냐가 관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세대들은 10~15년 후 성장잠재력 저하로 더 고통받게 된다.”

- 확장재정을 한다면 정부가 빚을 내야 한다. 미래세대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앞으로 3년간은 정부가 적자를 감당해야 한다. 정부 빚에 대해 오해가 있다. 후대에 채무가 넘어가 부담을 주는 것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빌렸을 때의 일이다. 현세대가 투자를 하는 것은 후세대에게도 도움이 된다. 국내에서 돈을 빌리면 채무 외 채권도 물려주는 것이다. 현세대가 투자를 잘하면 후세대에게도 도움이 된다. 성장률이 올라가면 채무부담도 가벼워진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유럽 각국이 국채 발행으로 전쟁자금을 조달해 막대한 빚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경제회복 속도가 높아져 문제가 해결됐다. 10%씩 7년 연속 성장하면 경제 규모는 두 배가 되고 채무 비율은 반으로 줄어든다. 최근 한은의 국민계정 개편 결과만으로도 우리나라 국가채무 비율이 38.2%에서 35.9%로 떨어지지 않았나. 반대로 그리스는 유럽중앙은행(ECB)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정부지출을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맸는데 정부채무를 15% 줄이는 동안 GDP가 18% 감소해 국가채무 비율이 더 늘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빚부담은 늘어난 것이다. 한국도 외환위기 때 과감한 재정적자로 돌아서면서 그나마 위기를 벗어났다. 현재 국제투자은행, 신용평가사, 국제기구 중에서 한국의 재정건전성을 걱정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미래를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작정 빚을 물려주지 않을 방법이 아니라 책임 있는 투자를 고민하는 것이다.”

-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투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휴먼뉴딜’ ‘디지털뉴딜’ ‘그린뉴딜’로 구성된 ‘선제적 뉴딜’ 정책을 제안한다. 교육과 복지를 중심으로 사람에 투자하자는 말이다. 국민 역량을 키우는 평생교육 시스템에 크게 투자를 해야 한다. 대학진학률은 높지만 상당수 대학교육이 부실하고 많은 학생들이 영문도 모르고 대학에 진학한다. 직장에 다니며 직업훈련을 병행하는 ‘온 더 잡 트레이닝’은 노동시장의 최상위층에만 집중돼 있다. 지방대학을 평생교육의 거점이 되도록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교사에 대한 투자도 필요하다. ‘티칭(teaching)’에서 ‘코칭(coaching)’으로 교육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일방적이지 않고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형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코칭을 할 인재도 키워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초등학생들에게 코딩교육을 하는데, 초등학생들은 코딩이 아니라 그림도 그리고, 자유롭게 뛰어놀아야 한다. 이런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복지 면에서는 고용보험과 전직훈련을 강화하고, 저출생 문제 해결에 대대적으로 돈을 쏟아야 한다. 기업의 물적투자가 아니라 사람의 역량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미래 경쟁력에 부합한다.”

- 전환을 실행하려면 정부지출은 얼마를 늘려야 할까.

“획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앞으로 3년 동안 정부가 애초 갖고 있는 2018~2022년 중기재정계획에서 매년 정해진 GDP 대비 정부 재정지출 비율을 1%씩 늘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해마다 50조원씩 추가로 더 쓰게 된다. 이 정도 해야 전환의 기틀이 잡히고 잠재성장률을 의미 있게 끌어올릴 수 있다. 그 후로는 적절한 증세 등으로 재정적자를 축소해도 된다. 전환적 뉴딜 투자 후에 국가채무 비율은 6.5~7% 정도 늘어나겠지만 15~25년 후에는 오히려 재정건전성에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박은하·박광연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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