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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윤동주 첫 시집 표지 판화가 ‘70년만의 발굴기’ 극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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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이정 판화전’ 공동 기획 이혜숙 홍선웅 작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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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첫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정음사에서 나왔다. 이 초판본의 장정자는 이정으로 되어 있다. 지금껏 이름만 알려져 있던 이정이 누구이고,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가 최근 확인됐다. 판화가 홍선웅 화백이 최근 <근대서지>(제19호)에 기고한 글 ‘표지 장정에서 출발한 판화가 이정’에서 이정이 본명 이주순이란 사실을 비롯해 지금껏 공백으로 남겨진 생의 자취를 탐구해 발표한 것이다. 홍 화백은 또 이정의 큰딸인 소설가 이혜숙 작가와 함께 <이정 판화전>도 기획했다. 이정의 첫 전시회로 지난달 24일 개막해 오는 16일까지 열린다.

전시장인 서울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지난 25일 홍 화백과 이 작가를 만났다. 그런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시’가 실린 시집이자 경매시장에서 수천만원하는 희귀 초판본의 표지 그림 작가가 무려 70여년 만에야 세상에 드러나게 된 연유가 제법 극적이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돌이었던 2017년 3월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어요. 그때 한문학자인 제 남편이 평소 친분이 있는 서지학자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을 보면서 표지를 그린 ‘이정’이 ‘내 장인 어른’이라고 지나가듯 말했대요.”(이 작가)

이 작가의 남편은 바로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이고, 그의 한마디에 깜짝 놀란 학자는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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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펴낸 <한국근대판화사>에서 이정이 그린 윤동주 초판 시집의 표지와 윤곤강 시집 <살어리>의 면지 다색목판화(석류)를 소개한 적이 있어요. 이를 기억한 오 회장이 따님인 이혜숙 작가를 저하고 연결해준 거예요.”(홍 화백)

그로부터 2년간 홍 화백은 이 작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자칫 묻힐 뻔했던 ‘근대 한국 1세대 판화가 이정’을 발굴해냈다. 무엇보다 이정의 누이동생인 이완순씨 도움이 컸다. 1930년생인 완순씨는 구순에도 또렷한 기억력으로 태어나서부터 평생 함께 지냈던 오빠의 일생을 증언해주었고, 스크랩북과 조각도 등 오빠의 유품을 고스란히 보관했다가 조카인 이 작가에게 물려주었다. 특히 스크랩북에는 윤동주와 윤곤강 시집에 실린 목판화의 원판이 ‘이정’, ‘상현’ 등 화명과 호를 새긴 채 들어있었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 장정
“이정은 훗날 정음사 편집부장 지낸 이주순”
큰딸 이혜숙 소설가·사위 임형택 명예교수
2017년 ‘윤동주 생애 100년전’ 계기로 ‘공개’
판화가 홍선웅 작가 조사해 서지학회 ‘발표’


목판화 원판·스크랩북 등 유품도 첫 전시

한겨레

“이주순은 1924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나 김화군 임남면 노남리에서 자랐다. 본관은 연안, 호는 상현이다.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8살 때 서울로 이주해 정동공립보통학교(지금의 봉래초교)를 졸업했다. 교장의 추천으로 15살 때인 1938년부터 조선총독부 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다. 1943년 일제 징용으로 규슈 오이타현 군부대에서 노역하다 해방 뒤 귀국했다. 징용 직전 잠시 을지로의 일본인 출판사에서 책표지 장정이나 속지 판화를 그렸다. 귀국 이듬해 부인 임순자와 결혼해 1녀2남을 뒀다. 1947년 가을 정음사의 의뢰로, 윤동주 유고시집의 표지 장정을 제작한다. 그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아 시집이 출간된 몇개월 뒤인 1948년 9월 정음사에 정식 입사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구로 피난해 공군 인쇄소와 공군부대 문관으로 일하다 1955년 상경했다. 1957년 정음사 재입사해 편집부장 겸 북디자이너로 1972년까지 재직했다. 1995년 11월 71살로 별세했다.’

홍 화백은 <근대서지> 기고문에서 특히 이정이 어떻게 독학으로 판화가가 될 수 있었는지를 스크랩북에 담긴 작품과 수집 자료, 몇가지 일화 등을 통해 추론해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이정은 총독부 도서관에서 만 14살의 소년가장으로 일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다락방에 가득했다. 어느 날 이정이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어머니가 그 그림들을 벽지로 써버렸다. 이정이 대성통곡하며 벽에서 떼어냈으나 이미 그림으로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총독부 학무국 관리 가와세 겐이치를 “그림 선생님”으로 부르며 그림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가와세는 해방되자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이주순을 데리고 가 그림 공부를 시켜주고 싶어했고 그 이후로도 편지로 유학을 권했다.’ ‘어쩌다 한번 (유학) 뜻을 내비쳤더니 어머니가 손목을 붙잡고 하염없이 우시기만 하시더라. 결국 내가 뜻을 접고 말았다.’ ‘이정은 조각도로 작은 목공예품을 만들기를 좋아해서 작은 수레와 신발 같은 유품을 남겼다.’ ‘스크랩북에는 회화나 드로잉보다는 1920~30년대 유명한 일본 목판화가들의 인쇄된 작품을 오려놓았다.’ ‘퇴사 이후에도 위탁 작업을 계속 한 이정은 1974년 정음사 최영해(외솔 최현배 선생의 아들) 사장 화갑기념 송사집 <세월도 강산도>의 장정과 제자, 표제지에 <십장생도> 축하판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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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갓난아기 때 내 얼굴을 스케치 해놓기도 하고 말년까지도 어머니의 얼굴을 모델로 여러 판화작품을 만드셨어요. 늘 조용히 취미로 뭔가를 만들었지만 자식들이나 남에게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저 자신 1982년 등단한 이래 수많은 소설과 시와 에세이를 발표했지만 ‘윤동주 시집 표지’에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못했던 거죠.”

이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뒤늦게나마 부친의 이름과 작품이 한국판화사에 제대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고 감회에 젖었다.

홍 화백은 “유품을 고스란히 보관해준 가족들 덕분에, 해방 전후 한국미술사의 빈공간이 채워지게 됐다. 특히 출판미술 쪽에서 가장 폭넓은 활동 궤적을 보였던 화가 정현웅과 함께 이 분야 전문 작가로 조명해볼만 하다”며 이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전시는 근대서지학회와 소명출판이 주최하고 화봉문고가 후원했다. 한국전쟁으로 출간되지 못한 김동리의 소설집 <역마>(驛馬)의 내제지 원본 판화 등 이정의 유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02)737-0057.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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