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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취재일기] 성범죄 피해자 조롱하는 ‘댓글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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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가영 사회2팀 기자


지난달 자신의 집에 설치한 몰래카메라로 여성 30명과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한 제약회사 대표 아들이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는 주로 연인이나 지인이었다. 가해자 이모(35)씨는 법정에서 “다들 제가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다. 지인에게 행한 잘못이라 더욱 반성하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 내용을 소개한 기사엔 “돈 있는 집 아들이니 여자들이 쉽게 잤을 거다” “한국 여자들은 돈이 최고인가 보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어떻게 몰카 가해자를 욕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느냐”는 댓글에는 ‘좋아요’만큼 ‘싫어요’가 표시됐다.

비슷한 일은 또 있다. 영국인 행세를 하며 스마트폰 채팅앱으로 여성에게 접근해 1400만원을 뜯어낸 모잠비크인에 관한 기사였다. 가짜 재력, 외모 등으로 온라인에서 신뢰를 형성한 후 금전을 요구한 이른바 ‘로맨스 스캠’ 사기였다. 댓글들은 가해자만 탓하지 않았다.

“재력가가 몇백만원 없어서 돈을 달라고 하겠나. 속은 여자들이 한심하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의 구애가 진짜인 줄 안다는 거냐. 인지능력이 없다” 등 피해자의 잘못으로 돌리는 이들의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호감을 악용해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보다는 ‘왜 그렇게 쉽게 몸과 마음을 줬느냐’고 피해자를 질책하는 게 현실이다.

누군가는 악플러의 일부 댓글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댓글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조사한 결과 81.6%가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은 사회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또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로 인해 내 생각이 바뀐 경험이 있다”고 했다.

범죄 피해자에게 이런 비난성 댓글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의 지원서비스 이용 경험 연구’를 보면 성폭력 피해를 본 연구대상자의 70% 이상이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보였고, 50% 이상이 자살 생각을 했으며 41%가 실제 자살을 시도했다. 2017년 여대생 A씨(20)가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후 익명게시판에 달린 ‘꽃뱀’이라는 댓글에 괴로워하다 자신의 집에서 목숨을 끊은 사건도 발생했다.

댓글을 본 다른 피해자가 자신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고발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실제로 로맨스 스캠 기사를 본 독자는 “내가 아니라 친구가 비슷한 피해를 겪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물론 가해자는 네 편, 피해자는 내 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그러나 마음을 줬던 상대에게 배신당하고 고통을 겪는 피해자의 가슴에 제3자가 나서 돌을 던지는 일은 멈춰야 한다.

이가영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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