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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삶과문화] 새로운 시대에서 만나고 싶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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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예술이 동경되던 시절 / 우상 된 대중가수는 ‘격세지감’ / 성공이 ‘사회적 옳음’ 행세 우려 / 삶·기쁨 존중받는 예술 기다려

1980년대 말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함께 불렀던 ‘향수’라는 가요를 기억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노래는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어렵게 살던 이동원이 집을 장만하게 됐다는 후담이 회자됐다. 하지만 서울음대 교수이자 정상급 테너였던 박인수는 그 노래로 인해 국립오페라단을 등져야 했다. 대중가수와 함께 음반을 녹음해 예술가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보다 8년 전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컨트리 팝 가수 존 덴버가 부른 ‘퍼햅스 러브’(Perhaps Love)가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건만, 당시 박인수를 향한 우리 클래식음악계의 비난은 상당히 높았다.

세계일보

주성혜 한국예종 교수·음악학


예술이 교양의 척도가 될 수 있고, 분야에 따라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이 있으며, 배고프고 고독한 예술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중·장년에게는 문화산업이 범국가적 관심이 되고, 젊은이가 선망하는 ‘성공’의 표상으로 대중가수와 배우를 거론하는 요즘의 현실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변화는 용기 있는 성찰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마련됐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내한공연과 H.O.T.나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그룹의 등장으로 일대 소동을 겪으면서 1990년대 우리 사회는 저속하다 여기던 대중문화를 어린 세대를 이해하는 통로로 받아들이게 됐다. 개인의 선택과 취향 존중에 눈뜨는 사회의식의 변화도 물론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방탄소년단(BTS), 지금은 이 한마디로도 충분한 K팝과 한국드라마의 국제적 흥행과 수입은 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할 만하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 가르던 시절을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세상의 음악을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으로 나누어 취급하던 중세의 유럽이나 당악·송악 등 중국서 유입된 음악과 이 땅의 향악을 구분지어 인식하던 우리 선조들의 시각이 연상된다. 음악은 사람이 있는 곳 어디에나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사람은 음악의 갈래를 나누고 영역을 정의하며, 느끼는 것 못지않게 그를 생각과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분류와 의미의 기준은 절대적이 아니라 시대마다 사회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발명되는 그 무엇인 셈이다.

유럽의 고전음악이 현대의 대중음악보다 우월하다든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생활밀착형 예술보다 고결하다는 믿음은 많이 엷어진 듯하다. 계통에 기대는 음악적 선입견을 극복하고 편하게 즐기는 음악, 엘리트음악의 권위에 맞서 폄훼된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게 됐으니 지금 우리 사회의 음악가치관은 한층 건강해졌다고 말해도 될까. 클래식음악가도 대중가수처럼 슈퍼스타가 되기를 꿈꾸고, 환호하는 사람의 수가 음악활동의 질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 됐다. 대중성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획득이 곧 전문성이고,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는 열쇠가 된다.

필자는 대중성과 산업적 성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새로운 예술관이 새로운 ‘사회적 옳음’으로 행세할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문화산업의 생산과정이 곧 창작의 과정이고, 문화상품의 상업적 성공이 창작의 성공인 양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상품성 없는 창작 작업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고 개인적 상상과 영감보다 기획된 학습과 조직적 훈련이 장려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함께 즐기는 예술의 존재는 당연히 값지지만, 대중성을 입증하는 상품으로서의 예술은 경제적 전략에 솔깃해 예술활동을 통한 인간의 교감과 향유의 기쁨을 간과할 수 있고, 대중성의 지나친 강조는 선동적 장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지한 개인의 목소리와 전문적 실체화를 부정하며 전통적 가치를 훼손할 위험도 있다.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한다. 나는 그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가 아직도 만나기 어려운 예술, 개인의 삶과 기쁨이 치열하게 존중받는 소중한 예술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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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혜 한국예종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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