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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미디어 세상]논변이 귀하고 비유가 헐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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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사정이 구한말 같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과 같다고도 한다. 인민이 분열하여 정파적으로 싸우는 모습이 해방 직후와 다름없다고 한다. 동족상잔 전쟁이 벌어지기 전 상황과 유사하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판이다. 난리가 나겠다는 경계심을 표현한 건지, 난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경향신문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지난 역사의 인물들이 다시 나와 활약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통속 역사극의 배역처럼 얄팍하게 보이는 인물들이라서 아쉽지만 말이다. 나라를 구한 영웅, 나라를 팔아먹은 자, 무력했던 지도자, 무지했던 측근, 이름 모를 의병에, 밀정에, 독립군에, 건달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출연자의 배역이 바뀐다. 매국노와 건달 역할을 맡은 이들이 이야기마다 다르다.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역사적 사실에 견주어 현실을 이해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 보자는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을 이렇게 이해하고 대응해도 좋은 것일까. 통속극 속에서 등장인물의 의도와 지식은 뻔하고, 이해관계는 단순하고, 갈등구도가 선명하다. 우리가 워낙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러려니 하려 해도, 복잡한 현실을 극적으로 단순화해서, 해법을 시원 소박하게 제시해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배운 자들이 주로 이렇게 말한다는 게 진짜 문제다. 말마다 고사성어요, 역사적 비유다. 논리적 논변과 통계적 증거에 더해 고사를 인용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유비로 논증을 대신한다. 사자성어가 증거가 될 수 없고, 역사를 인용함으로써 논변을 갈음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번 한·일 외교통상 분쟁으로 분명해진 점이 있다. 우리 사회에 그 많은 일본 전문가들이 있건만, 정작 시민들이 언론 매체에서 읽고 배울 만한 논변을 확인 가능한 증거와 함께 일관되게 제시하는 분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민들은 처음부터 이번 사태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언론은 물론 정부 발표를 보더라도, 아베 정부의 결정 배경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본 국내 정치에서 연원한 것인지, 경제통상을 고려한 것인지, 한반도 정세변경과 관련한 전략적 문제인지, 인권과 청산되지 않은 식민주의 문제인지, 아니면 해묵은 외교적 사안에 그치는 수준의 문제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심각하게도 아직 분쟁이 계속되건만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헤매는 사이 시민들이 나선다. 시민들은 지식인 담론을 흉내 내어 고사성어와 역사적 유비를 동원해서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 담론 광장을 둘러보자. 자신을 왜란 때 의병, 구한말 애국지사, 만주벌판 광복군, 해방공간 이념건달, 한국전쟁 학도병에 빙의한 시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자기 살길만 찾는 양반, 매국노, 기회주의자, 반역자를 응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일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자로서, 고려 말 무인정권의 서생 같은 답답한 심정으로 일본 전문가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제발 일본을 아는 분들은 아베 정부가 왜 저러는지 그리고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가 아닌 논변으로 말해 달라. 그래야 듣고 말지 않고, 평가해서 비교해 볼 수 있지 않겠나. 주장에 덧붙여 근거를 역사적 사건이나 통계적 사실로 뒷받침해 달라. 굳이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그런 비유가 왜 적절한지 이유를 별도로 제시해 달라.

또한 일본에 친구들을 두고 있는 처지에서 나는 이런 부탁도 하고 싶다. 지난 참의원 선거만 보더라도 모든 일본인이 아베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별 사람들이 다 있듯이, 일본도 그럴 것이다. 그중 누가 동지가 될 수 있을까, 누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구를 어디까지 설득해야 아베 정부의 노선을 바꿀 수 있을까. 설득을 위해서 우리 쪽에서 먼저 준비하고 감수해야 할 바는 무엇일까. 이 역시 이야기가 아닌 논변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준웅 |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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