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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기고]일본이 놓친 것,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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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벨기에인인 주인공은 통역사로 일본 기업에 취직하는데, 작가는 그 일본 기업을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사과할 줄 모르며, 오만한 형식과 절차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변화할 줄 모르는 조직으로 묘사한다.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우리를 배제하는 일본을 보면서 이 소설 속 일본 기업을 생각했다. 이런 상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건 무엇일까?

경향신문

미·중 무역전쟁의 화웨이 사례를 보자. 중국의 기술굴기를 이끄는 4차 산업혁명의 대표주자인 화웨이는 무역전쟁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표적이 됐고 결국 지난 5월15일 미국은 자국 기업들에 화웨이와의 사업을 금지하라는 사실상 수출금지 조치를 했다. 세계 2위 스마트폰 공급업체인 화웨이가 스마트폰 운영시스템(OS)인 안드로이드를 더 이상 공급받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자체 OS를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데에는 보통 2~3년이 걸리기에 당장에 세계 시장에서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화웨이 위기설’은 의외로 빨리 마무리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화웨이그룹의 올 상반기 매출도 상승했고, 2020년까지 1000억달러 수준의 매출 유지를 장담한다. 화웨이의 자신감은 자체 OS 훙멍 개발을 올해 안에 마치고 출시까지 할 수 있다는 데서 왔다. 앞으로 중국은 화웨이 폰에 자체 OS를 사용할 것이고, 안드로이드는 세계 최대 시장을 잃어버리게 됐다. 이처럼 화웨이는 기술 개발의 ‘속도’를 ‘가속’하는 방법으로 무역전쟁에서 싸우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의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밥 교수는 4차 산업 시장에서 속도의 중요성을 재미있게 비유했다.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고기가 느린 고기를 잡아먹는 시장”이라고. 즉 미·중 무역전쟁에서의 승리는 덩치 큰 쪽이 아닌 더 빠른 쪽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수출규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기업의 기술 진보를 막으려는 일본의 시도를 뛰어넘는 것은 더 빠른 기술 진보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 진보를 가속한다는 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은 개인 통신과 자율주행차, 스마트 공장, 스마트 팜, 공유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에 걸쳐 일어난다. 그런데 최근 카카오 택시나 타다 사례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이 변화는 기술과 기업만 준비됐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과 인력의 문제, 정부의 법 제도의 합리화와 개선과 같이 사회 전체가 빠른 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두려움과 떨림>의 주인공은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일본 회사의 비합리적 처우로 화장실 청소부가 되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소설가로 변모해 성공한다. 반칙하는 상대를 맞잡고 싸우는 데서 끝난 게 아니라 자기 변화에 성공한 결말이 통쾌하다. 4차 산업혁명은 속도전이고, 스스로 변화를 빠르게 수용할 역량을 갖춰야 가속하고 승리할 수 있다. 일본은 스스로 빨리 뛸 변화 대신 추월하려는 옆 선수의 발목 잡기에 매달리고 있다. 무역은 어차피 불공정한 게임이지만 다행히도 4차 산업혁명의 속도전에선 간혹 반칙에 넘어지더라도 다시 따라잡을 만큼 가속이 가능하다. 다만, 그 가속은 스스로 변화할 준비가 됐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본은 놓치고 있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지수 | 호서대 글로벌 통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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