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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지하철 개통식의 기념 찹쌀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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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15일은 서울에 지하철이 개통된 날이다. 그날 석간신문에는 “대망의 지하철 전철시대 개막” “수도권 교통의 혁명” 등의 제목과 함께 여러 기사가 실렸다. 세계 지하철 건설 역사상 가장 짧은 공사 기간을 자랑하며, m당 건설단가가 300만원으로 국내에서 제일 비싼 공사비가 들었다거나, 공사기간 중 파낸 흙으로 군자동 저습지를 메웠다거나, 청량리에서 열린 개통식이나 인천에서의 시민환영대회 사진과 함께 그날 시승을 한 시민들의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말로만 듣던 지하철을 타니 정신이 아찔하다든가, 30초 만에 문이 닫히니 어리둥절하다든가와 같은. 그날 기념 승차권을 가진 2만여명의 시민들이 “신나게 도는 선풍기 아래서 피서마저 겸한 담소를 나누며” 시승을 했다고 적혀 있다.

경향신문

그 신나게 도는 선풍기 아래, 나도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 밑을 시속 40㎞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엄마와 떡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광복절이었다. 또한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대통령 부인이 총에 맞은 날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우리는 느긋하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화면으로 그 아수라장을 목격했다. 뭔가 일이 일어난 것 같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으며, 무슨 작은 해프닝이겠거니 생각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종각역으로 갔다. 무료 왕복 지하철표를 받아 종각에서 청량리까지 갔다가 다시 열차를 바꿔 타고 종각역으로 돌아왔다. 서울역이 아니라 종각역으로 간 것은 떡 때문이었다.

유명한 종로의 떡집에서 개통기념으로 떡을 나눠준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길게 줄을 서서 찹쌀떡을 받았다. 다섯 개를 한 줄로 묶어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눠주는 떡을. 엄마는 떡집 주인이 어린애라고 주지 않으려는 것을 내가 기어이 딱 버티고 서서 “나는 왜 안 줘요? 나도 사람 하나인데?” 하며 따졌다고 했다. 그 모습이 정말 우습고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나? 결국 주인은 “자, 한 사람이다” 하고 우리에게 떡 한 줄을 더 내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떡 두 줄을 받아, 한 줄은 지하철에서 까먹고 나머지 한 줄은 집에 가서 먹었다고 한다. 오후에 간 사람들은 떡도 못 받았다며, 일찍 가서 받아 먹은 거라고 은근히 자랑하듯 말하면서. 엄마는 그걸 어떻게 알고 그 아침부터 찾아갔는지와 그날 지하철을 탄 느낌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두꺼운 종이승차권의 질감까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그래도 지하철 안에서 먹었던 찹쌀떡은 정말 맛이 좋았다고 기억했다.

그리하여 엄마에게 남겨진 1974년 광복절의 기억을 종합하면, ‘대통령 부인이 죽은 날 그것도 모른 채 새로 개통한 지하철을 타고 공짜 떡을 먹으며 좋아했다’로 정리된다. 또한 나는 기어이 한몫의 떡을 챙겨 아버지에게 가져다준 아이로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후 나는 수도권 전철과 더불어 살았다. 1호선 전철역에서 가까운 인천의 어느 동네로 이사를 갔고, 바로 그 전철을 타고 통학을 했고, 그 전철을 타고 종로통으로 가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했으며,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주 뜀박질을 했다. 지하철 개통을 기념하여 나눠준 공짜 표와 기념 떡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수도권 전철과 지하철은 나의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신문기사의 표현대로 수도권 교통의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당시에, 엄마도 나도 몰랐던 것이 있었다. 최단기간 최고비용으로 개통된 수도권 전철이 무슨 돈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무상원조가 아니라 고금리 차관이었으며 고리로 돈을 빌려주면서도 일본 물자만 구입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는 것을, 열차 한 대에 두 배의 폭리는 취하며 팔아먹었다는 것을, 기술이전은커녕 하급공사만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고금리로 빌려준 돈은 결국 공사를 담당한 전범기업의 주머니로 돌아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무상원조라는 면죄부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는 산업구조의 족쇄로 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장의 잔치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개통식의 리본을 자르기 위해. 그러나 그것이 45년이 흐른 후, 부메랑처럼 돌아와 뒤통수를 치게 될지도 알았을까? 알았더라도 그렇게 했을까?

45년 전 서울 거리는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의 물결 속에 축제 분위기를 더했으며, 시민들은 처음으로 지하철 시대를 실감했다고 그날의 석간신문은 전한다. 그리고 그때 네 살이었던 나는 내 몫의 기념 찹쌀떡을 챙겨, 시민의 대열에 합류해 지하철을 탔다. 내가 탄 지하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지하철이 45년 후 어느 곳에 가 닿을지, 아무것도 모른 채 공짜 떡이나 먹으면서 좋아했다.

천운영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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