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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권영민의사색의창] 작지만 확실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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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 세대’가 된 요즘의 청춘들 / 미래 꿈보다 소소한 행복 추구 / 청년들이 일어설 수 없는 사회는 / 죽은 사회… 삶 개척할 기회 줘야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은 이제 하나의 유행어가 됐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그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을 줄여서 ‘소확행’이라고 썼다. 그가 전에 발표한 수필 속에 이 말이 등장한다.

‘소확행’은 지난 5년 전부터 대만에서 그를 좋아하는 젊은이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상품 광고는 물론 심지어 회사 이름까지도 ‘소확행’이라고 쓰기도 했다. 지난 대만 총통 선거 중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연설도 등장했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현실에 안주한 채 만족하도록 만드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시대적 요구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생겨났을 정도였다.

세계일보

권영민 문학평론가 미국 버클리대 겸임교수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를 대변하는 유행어로 굳어지고 있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를 보면, 요즘의 젊은 구직자들이 ‘소확행’(51.8%) ‘워라벨’(30%) ‘욜로’(18.2%) 등 순으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패턴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소확행’은 더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워라벨’은 ‘일(work)’과 ‘삶(life)’의 ‘조화(balance)’를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해 하나로 줄여놓은 말이다. ‘욜로’라는 말은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낸 신조어다. 현재의 자기 삶에서 느끼는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해 소비하는 태도를 뜻한다고 한다. 이 같은 신조어가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현실 속의 삶에서 거창한 목표나 꿈을 접어버리고, 불확실한 행복을 좇기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의 꿈을 좇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취직하기는 어렵고 돈벌이도 쉽지 않아서 삶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의 만족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세웠던 ‘소확행’이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감을 뜻한다. 테니스 코트에서 신나게 테니스를 치고 나서 차디찬 맥주를 들이켜는 기분이라든지, 샤워를 마치고 새 내의를 갈아입으면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라든지, 아파트 정원을 걷다가 보도 블록 사이에서 키 작은 노란 민들레꽃이 막 피어난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 같은 것은 우리가 그 가치를 놓치고 있던 감정이다. ‘소확행’은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에서 일상적 현실의 삶 가운데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자잘한 행복감을 뜻한다. 갓 구워낸 식빵을 손으로 찢어먹을 때 느끼는 신선하고도 고소한 맛이라든지, 서랍을 열었을 때 새 팬티가 착착 잘 접혀서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그는 ‘소확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이나 기쁨의 감정은 일부러 그런 것을 추구해 얻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즐기는 그런 기분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가 삶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고 ‘소확행’에 집착한다거나, 자기들이 이뤄낼 수 있는 작은 성취에 민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식의 해석까지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오히려 무라카미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힘들게 대학을 졸업한 뒤에 아무 대책도 없이 마치 무능력자처럼 사회의 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좋은 일자리를 찾고 멋지게 결혼해 행복한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꿈이 되고 말았다. 이 같은 문제는 매일같이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도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미세먼지보다 더 심각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만나는 북·미회담보다 더 긴요하다. 이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정치인은 여전히 입바른 소리만 뱉어내면서 파당적인 이익만 따지고 말로만 청년 일자리 수만개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친다. 젊은 세대들은 어두운 현실에 좌절한 채로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니 여기에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니 하면서 자기 비하에 빠져들고 있다. 이 환멸의 시대를 스스로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딱하다. 경제가 위기라든지 일자리가 부족하다든지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해에 수십만명의 대졸 학력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제 와서 취업의 눈높이를 낮추라고 훈수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키워낸 사회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적 과제가 돼야 한다. 미래의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이끌어갈 이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와 권한을 제대로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젊은이들이 삶의 꿈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라고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우리 사회의 미래는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가 일어설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미래의 주역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 삶에 대한 제대로 된 권한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떻게 사회를 떠맡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권영민 문학평론가 미국 버클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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