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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혁명가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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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김단야가 말년에 쓴 ‘자전’ 통해 3·1운동에서 한 역할 확인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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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는 생애 말년에 자신의 혁명운동 참여 내력에 관해 글을 썼다. ‘자전’(自傳)이라는 제목의 10여 쪽짜리 원고였다. 이 글에서 그는 언제 처음 혁명운동에 참여했는지를 밝혔다. 바로 3·1운동 때였다. 19살 나던 해,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혁명적 삶을 시작했노라고 썼다.

명단에 누락된 배재고보 학생 대표



“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이란 바로 2·8독립선언서를 가리킨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고보 재학생 김단야에게 큰 감화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로 많은 복본을 만들었다. 동료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김단야는 여러 차례 필사로 내용을 숙지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서의 정세관과 정책론 등이 그의 내면에서 큰 공명을 얻었으리라고 판단된다.

김단야가 경성 시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학생위원회에 참여했다는 문장이 주목된다. 그는 배재고보 대표 자격으로 그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전야에 이러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진다. 종래에도 학생단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1919년 1월 초순과 하순에 중국음식점 대관원에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몰래 모임을 열어 학생 지도부를 구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른바 ‘대관원 회합’이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을 뿐, 고보생 대표들은 포함하진 않았다. 고보별 학생 대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2월 초쯤 전문학교 학생단 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해 고보생 대표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 망라된 고보와 그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경성고보: 박쾌인, 김백평, 박노영. 중앙학교: 장기욱.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결. 경신학교: 강우열, 신창준. 선린상업: 이규송, 정세현.

이 명단은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성에는 8개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배재고보·휘문고보·양정고보 세 곳이 누락돼 있다. 이 명단 외에 숨겨진 사람이 더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김단야의 진술은 이런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해준다. 누락된 세 학교 가운데 배재고보 학생 대표가 누구였는지는 이제 짐작할 수 있다.

미성년자여서 매 90대 맞고 석방



김단야에 따르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비밀 학생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유기적인 연락을 했다. 바로 민족대표 33인을 가리킨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민족대표와 연계하면서도 그와 독립적으로 비밀결사 2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문학교 학생 대표 조직과 고보생 대표 조직이다. 이 중 고보생 대표 조직, 곧 김단야가 말하는 비합법 학생위원회는 3·1운동에 즈음해 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첫째, 만세 시위 현장에 학생 대중을 동원한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 곳곳에 살포한다. 셋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주재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한다.

경성의 외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대목에 유의하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이 역할은 배재고보 교사 김진호가 맡았다고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3월1일 정오에 각자 맡은 외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영사관에 전달한 장용하뿐이었다. 그는 김진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2월27일 중국영사관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했다. 이튿날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았고, 3월1일 정오 중국영사관에 가서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기존 연구 성과와 김단야의 진술 사이에 역할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는 불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공통점도 있음에 유의할 만하다.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선언서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단야와 장용하 등이 영국영사관과 프랑스 선교사, 중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준비 과정에만 멈추지 않았다. 김단야는 3월1일 이후에도 쉼 없이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3월1일 후에 나는 학교 동무들과 함께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 인쇄물을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고향 쪽으로 내려가 시위를 두 곳에서 성공적으로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징역 3개월 대신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판사의 말로는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3일에 걸쳐 매 90대를 맞고 난 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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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로 체포돼, 검거되지 않은 김기진



지하 인쇄물 ‘반도의 목탁’ 제작에 참여했다는 정보에 눈길이 간다.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19년 3~4월에는 수많은 지하 인쇄물이 조선 전역에 유포됐다. 경성에서 발간된 정기간행물만 해도 <조선독립신문> <자유민보> <진민보> <국민신보> <경성단신문> <자유신종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경고문’ ‘격문’이라는 제목 아래 숱한 반일 인쇄물이 나왔다. ‘반도의 목탁’은 경찰에게 적발된 탓에 관련자들이 누군지 이미 알려져 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배재고보 3학년 학생 장용하·이봉순·염형우와 경성고보생 이춘봉,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등 고보생 5명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1∼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반도의 목탁’ 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체포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었다. 김단야 외에 김기진이 있었다. 뒷날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개척한 팔봉 김기진도 구성원이었다. 배재고보 3학년이던 김기진은 같은 반 반장이던 장용하와 함께 비합법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3월1일 밤부터 장용하의 하숙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면서 인쇄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구는 등사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 관훈동에서 소격동으로 이르는 골목을 걸으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인쇄물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기진은 3월5일 남대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까닭에 이 비밀단체 검거 사건에서 벗어났고, 김단야는 3월 중순 귀향함으로써 그렇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김천 개령면 동부동이 김단야의 고향이었다. 귀향한 이후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간 3월 중하순은 3·1운동이 ‘개시 국면’을 넘어 시위 군중과 탄압 군경 사이에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는 ‘파상 국면’에 있었던 때다. 김단야는 김천의 청년들을 결속해 만세시위를 꾀했다. 그 결과 두 차례 만세시위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3월24일 고향 마을 뒷산에서 벌어진 산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 만세시위는 일본 관헌의 탄압에 노출되고 말았다.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체포됐는데 그중 네 사람이 재판에 회부됐다. 20~38살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학생 김태연(金泰淵)이 포함됐다. 김태연은 바로 김단야의 본명이었다. 피고인들은 그해 4월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징역 3개월에 처해야 하지만 나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태형 9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3·1운동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수형 시설이 부족했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태형이란 엉덩이를 나무 막대로 내려치는 형벌을 말한다. 조선 강점 직후 1912년 ‘조선태형령’으로 법제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식민지 토착민인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차별적이자 모욕적인 징벌이었고, 인간 몸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김단야와 그 동료들은 하루 30대씩 사흘에 걸쳐 모두 90대의 매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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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



김단야는 3·1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숱한 무명의 유공자와 희생자들처럼 그의 3·1운동 참가 사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단야의 3·1운동 행적이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그는 3·1운동 발발 이전에 이미 비밀 학생위원회 일원이었고, 시위가 일어난 뒤에도 비밀결사 ‘반도의 목탁’ 팀의 구성원으로서 반일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에 헌신했다. 3월 중순에는 농촌 만세시위운동 조직화에 참여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야만적인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3·1운동은 김단야에게는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비밀결사 참여, 외국 망명, 사회주의 수용, 귀국 도중 체포와 형무소 수감,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김단야 혁명운동사의 첫 페이지에는 3·1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 문헌

1.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2. ‘3·1항쟁기의 한국학생운동-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 <논문집> 8, 숙명여자대학교, 5쪽, 1968년.

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2>, 탐구당, 166쪽, 1966년.

4.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도 장용하 등 판결’, ,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229쪽, 1971년.

5. 김팔봉, ‘片片夜話 71, 배재와 3·1운동’, , <동아일보> 1974년 5월23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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