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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슈 강제징용 피해자와 소송

광복 74주년, 여전히 흐르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눈물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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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로 광복 74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국내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해방과 함께 강제 노동에서 벗어났지만, 고향으로 향하는 배에서 겪은 해상 폭발사고로 가족과 이웃을 잃은 깊은 고통이 수십년이 지나도록 씻기지 않아서다. 일본의 사고 은폐 시도도 이들이 분노하는 커다란 이유다.

세계일보

부산 중구 수미르공원에서 열린 ‘우키시마호 폭침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 참여한 시민들이 국화를 바치고 있다. 사진은 2014년 8월22일 촬영. 연합뉴스


◆출항 이틀 만에 폭발로 귀향선 침몰…생존 할아버지 “일본 고의가 분명”

1945년 8월22일,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군사시설에서 부산으로 떠나는 우키시마(浮島)호에 오른 장영도(87·당시 13세) 할아버지는 사고 충격을 아직도 씻어내지 못했다. 출항 이틀 후(24일), 원인미상의 폭발로 인한 침몰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아픔이 커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어선을 타고 가까스로 사고 현장을 벗어났다.

일본의 사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희생자가 8000명 규모라는 생존자·유족 주장에 우리 정부가 2005년 조사를 벌였지만, 우키시마호 침몰 사망자가 524명이라는 일본 발표의 부정확성만 확인했을 뿐 폭발 이유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밝히지 못했다.





장 할아버지는 1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해방 후 기쁨에 들뜬 강제징용자들은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태워주겠다고 하니 싫어하지 않았다”며 “한국인 수천명이 (배를) 타고자 기다리던 광경이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사망자가 524명이라는 일본 주장에 “생존자들은 (사고로) 2000명~3000명이 죽었다고 말한다”며 “(일본의 통계와) 수적인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장 할아버지는 사고 원인이 ‘미군 폭격’이라는 일본 입장에 대해서도 “(정말 그랬다면 사고 직후) 내가 앞이나 뒤로 넘어져야 했다”며 “물로 딱 떨어졌다”고 맞섰다. 그는 “폭침에 따른 흔적인 ‘물기둥’을 봤다는 증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며 “배 안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게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증언을 위해 일본 최고재판소에도 갔지만 현지 언론 통제로 사고 관련 보도가 나지 않았다”며 “(정부 등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저의가 있으니 매스컴을 통제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524명이 숨진 사고를 보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일보

제주도 방공호 건설 현장에 끌려갔다가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발생한 선박 화재사고에서 살아남은 강제징용 피해자 김백운(92) 할아버지. 세계일보 자료사진


◆“예전 일을 말해서 무엇 하겠나”…‘국내 강제징용’ 피해 할아버지도 탄식

앞서 세계일보가 지난 2월 전남 목포를 찾아가 만났던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 김백운(92) 할아버지(세계일보 기사 3월1일자 참조) 역시 비슷한 기억이 있다. 해남 옥매광산에서 형과 함께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김 할아버지는 1945년 3월, 제주도 모슬포 인근 방공호 건설현장에 끌려갔으며 해방 후 배를 타고 고향에 돌아오다 원인불명의 폭발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배에 탔던 250여명 중 117명만 살아 남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김 할아버지는 “배에 불만 나지 않았어도 모두 함께 해남에 올 수 있었을 것”이라며 “미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할아버지는 14일 통화에서 “(그러한 일들을) 이야기해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냐”며 나아진 것 없는 현실에 다시 가슴을 쳤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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