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정치부 차장 |
김정은이 피식 웃었다. 허둥대는 노광철(인민무력상) 때문이었다.
지난해 9월 19일 평양 백화원. 남북 군사합의서에 서명한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이 포즈를 취한 것과 달리 노광철은 합의서 서명 페이지를 찾지 못해 한참 뒤적거렸다. 10여 초나 흘렀다. 그러자 김정은이 ‘뭔 일인가’ 싶어 노광철을 살펴보다가 상황을 파악하고선 피식 웃은 것.
이렇게 체결됐던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가 내달 1주년을 맞는다. 하나 벌써부터 남북 간에 ‘위반이다’ ‘아니다’ 신경전이 거세다. 야권에선 북한의 연쇄 도발을 두고 “합의서를 위반했다”고 비판한다. 북한은 우리의 한미 연합훈련과 첨단무기 도입을 꼬집으며 “남한이 위반한 것”이라고 한다.
누가 합의서를 위반한 것인가. 제1조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적대행위’란 범위 자체가 모호하고, 선언적 조항이라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다. 제1조 1항은 보다 구체적이다. ‘쌍방(남북)은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 문제, 다양한 형태의 봉쇄 차단 및 항행방해 문제, 상대방에 대한 정찰행위 중지 문제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여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자세히 보면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런 점들을 향후 논의하겠다는 합의다. 이를 감안하면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나 한미 연합훈련이 위반인지는 애매한 대목이 없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북한의 도발 이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5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위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다음 날 운영위원회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나서 “위반이 아니다”고 정정했다.
이런 가운데 불필요한 말들까지 나왔다. 회피 기동을 하는 ‘북한판 이스칸데르’에 대한 위협이 높아지자 정 장관은 지난달 31일 “우리도 가진 기술”이라고 공개해 버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2일 “(북한 무기보다) 우리가 몇 단계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가 더 신형을 갖고 있다”며 군사 기밀을 공개한 격이다.
이렇듯 올해 재개된 북한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정부 대응은 무디거나 엉성하다. 올 들어 벌써 7번째, 그리고 최근 3주 사이 5차례 도발이 이어지자 정부 한편에선 “또 쐈나 보다”는 안일한 인식까지 감지된다. 북한의 도발이 하나의 ‘뉴 노멀’로 자리 잡는 현상인 것이다.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렸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관계부처 장관회의로 낮춰지더니 10일엔 관계장관 화상회의로 대체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의 묵인 속에 북한이 ‘대미 협상용’으로 한국을 위협하고, 우리가 침묵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더 이상 북-미는 한국을 통해 대화하지 않는다. 물론 이달 말경 북-미 실무협상이 시작되면 정부의 숨통은 지금보단 트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수틀리면 언제든 우리를 압박할 수 있고, 미국은 대화 유지를 위해 이를 묵인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북한의 도발을 익숙한 일상의 풍경으로 여기는 상황이 재연되지 말란 법도 없어 보인다.
황인찬 정치부 차장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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