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미래탐험대 100] [33] 워싱턴 참전 용사 행사현장
21세 김유나에게 자유의 가치란
지난달 말 미국 워싱턴DC 로널드 레이건 공항 출구에서 티셔츠를 입은 한 남성이 성조기를 들고 행진했다. 그 뒤를 휠체어 탄 노병(老兵)들이 뒤따랐다. 짐을 찾거나 지인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갑자기 멈췄다. 곧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참전 용사에게 갈채를 보낸다. 비가 오면 우산을 펴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노병들은 미국 각지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및 6·25 참전 용사들에게 워싱턴DC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한 '아너 플라이트(Honor Flight·명예 비행)' 참가자들이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만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워싱턴DC를 찾았다. 비영리재단이 기부금을 받아 운영한다. 이날 워싱턴DC에 온 이들은 미주리주(州) 세인트루이스에서 왔다고 했다.
(작은 사진 왼쪽) 지난달 13일 김유나 탐험대원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미국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할 감사 편지를 받기 위해 '여기, 먼 나라 참전 노병들이 있습니다'란 팻말을 들고 서 있는 모습. (오른쪽) 김 대원은 이렇게 받은 편지를 같은 달 20일 미국의 6·25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했다. (큰 사진) 이날 워싱턴DC를 방문한 미주리주(州) 출신 노병들이 공항에 내리자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로 이들을 맞았다. /조인원·양은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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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동아리(한국 대학생 평화·안보 연구회) 활동을 하며 미국인이 군인을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노병들과 동행하며 목격한 참전 용사에 대한 예우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전쟁 영웅이 타고 있다.' 종이판을 앞 유리창에 붙인 버스가 공항에서 출발할 때까지 박수는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도로에 들어서자 경찰차가 버스를 호위했다. 막히는 길에선 앞에 가던 차가 모두 가장자리로 붙어 길을 터주기도 했다. 만약 한국에서 '참전 용사'라는 표지를 단 버스가 비슷하게 이동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노병들은 2차 대전 기념관, 6·25 참전 기념관 등에 차례로 들렀다. '6·25 참전 용사'라는 글자가 적힌 모자를 알아본 시민이 종종 다가와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린다"라고 악수를 청했다. 이날 워싱턴DC는 섭씨 36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전직 간호사라는 몰리씨는 버스가 링컨기념관에 머문 한 시간 반 동안 뙤약볕이 내리쬐는 광장에 혼자 서 있었다. "제 아들 역시 지금 군에 있거든요. 참전 용사들이 버스에 오르내리지 않아도 시원한 생수를 드실 수 있도록 버스 앞에서 대기하는 거예요."
전사한 여군들을 기념하기 위한 위민스 메모리얼(Women's Memorial)에서 나는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온 선물들을 꺼냈다. 직접 만든 열쇠고리와 편지, 그리고 앨범이었다. 앨범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참전 용사에게 편지 쓰기' 캠페인을 진행하며 찍은 사진과 시민의 편지를 정리한 것이다. '여러분 덕분에 학교도 다니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어요'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노병 여덟 분이 모여들었다. 얘기가 끝나자 한 노병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붉어진 눈으로 "정말 고맙다"라고 했다. '감사하다'는 소박한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큰 힘을 지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찾은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장에서도 군인을 향한 미국인들의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다. 6회가 끝나고 난 후 복무 중인 군인들이 필드에 섰다. 이들의 모습이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전광판에 비쳤다. 모든 사람이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미국인이 이토록 열렬히 군인을 존중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휠체어를 탄 노병과 무릎을 꿇고 앉아 대화하던 미건 오브라이언씨는 "이들은 인생을 바쳐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니까"라고 했다. "그들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와 당신 나라에 자유가 보장될 수 있을까요."(드루 헨더슨),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분들께 당연히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짐 프티) 그렇다. 누군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우리가 너무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울산 잘 있느냐고 물어본 老兵… "커다란 공업도시 됐죠" 답하자 엄지 척
미국 워싱턴DC에서 지난달 만난 6·25 참전 용사들은 70년 전 한국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이들은 '지옥'이었던 한반도가 선진국과 실력을 겨루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11개월간 대구에서 근무한 레이먼드 호플린씨는 "서너 살 된 아이가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는 게 일상이었다. 시체를 땅에 묻고 돌아서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항상 마음의 빚처럼 가슴이 아팠다오. 한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한 것은 대단한 일이지."
울산에서 공군으로 근무한 제임스 라이트씨는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울산은 잘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전부이던 나라가 경제 강국이 되었고 울산은 커다란 공업도시가 됐다"고 답했다. 라이트씨는 자기 일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북한 김화 지역에서 복무한 존씨는 "당시 인천은 완전히 망가졌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 한강에도 다리가 하나뿐이었던 듯한데…"라고 했다. 나는 현재 한강엔 20개가 넘는 다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기대보다 훨씬 발전했군"이라며 활짝 웃었다.
1950~1954년 한국에서 복무했다는 스티브 다이씨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오로지 대한민국만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아니지. 대한민국엔 기아차와 같은 훌륭한 회사도 여럿 있지 않은가. 한국이 자유의 국가가 되어서 난 정말 기쁘다오."
[미탐 100 다녀왔습니다] 앞으로 더 자주 말하겠습니다 "당신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자유'는 대한민국이 세워진 순간부터 함께한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까요. 알지도 못하는 나라, 먼 이국(異國)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청춘들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찾아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워싱턴DC에서 본 미국인들은 참전 용사에게 존경을 표하고 전쟁을 기념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성숙한 문화는 진정으로 대우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왜 참전 용사를 존경하는지 묻는 저에게 한 미국인은 "한국도 우리처럼 참전용사를 존경하지 않나요"라고 되묻더군요. 저는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앞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모든 분께 더 자주 말하겠습니다. "당신의 헌신에 감사합니다."
[워싱턴DC=김유나 탐험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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