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 자백
사회가 원했던 연극·관습·거짓말 거부한 '아싸'
고유정類 인간보다 80년 前 이방인이 더 진실하게 느껴져
권지예 소설가 |
말복이 지났지만 연일 폭염 경보다. 기온뿐 아니라 습도까지 높은 숨 막히는 무더위는 잠복 중인 짜증을 폭발하게 한다. 인간의 감정이나 기분은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데, 여름이 되면 상해·폭행 같은 폭력 범죄율이 가장 높은 시기라고 경찰 통계는 밝히고 있다.
요즘 한낮의 그악스러운 햇빛과 열기 속에 있다 보면 한 남자가 떠오른다.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 도대체 태양이 어쨌기에? 살인하기 딱 좋은 날이 있는 걸까? 소설 속 그는 그날 그리 친하지 않은 친구의 일에 연루되어 처음 보는 아랍인을 우발적으로 쏘게 되었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때 해변에 누워 있던 아랍인이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그에게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 그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은 그때 그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고, 움직이지 않는 아랍인의 몸에 연달아 네 방을 쏘았다.
살인자 뫼르소는 어떤 인간인가?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고 나이도 잊을 만큼 무심한 아들이며, 엄마의 죽음 앞에서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엄마의 시신도 보려 하지 않고, 그 옆에서 밀크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장례를 치른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마리와 코미디 영화를 보고 상중에 섹스했다. 이런 증언을 토대로 재판부에서는 살인자보다 더 나쁜 냉혈한, 패륜아에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그를 매도한다.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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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뫼르소는 어머니에게뿐 아니라 삶의 태도가 그런 인간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가식이 없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죽어도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인간인 것이다. 예심 판사는 그에게 죄를 뉘우치고 신을 받아들인다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이 의미 없고 귀찮다고 여긴다.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도 변명하거나 정당방위를 주장하지도 않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범행 동기를 묻는 법정에서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몰라 태양 때문이었다고 했던 뫼르소의 진술은 진실하게 느껴진다. 최근 재판에서 계획 범죄의 정황이 나왔는데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이라고 우기며 살인적 폭염 속에서 국민의 공분에 불을 지피는 고유정보다 말이다.
카뮈는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이 작품의 미국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주인공이 유희(game)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여기서 유희란 관습에 따라 연출하게 되는 일종의 연극, 체면을 위한 거짓말 등 사회의 암묵적인 게임의 법칙을 말하는데, 뫼르소는 그런 법칙에 관심이 없는 주변인이므로 '이방인'이라는 의미이다. 세상과 그는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을 느끼며 이방인을 공격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로 아웃사이더를 줄인 '아싸'와 인사이더를 줄인 '인싸'가 있다. 소외의 위험과 공격을 두려워하는 누구나 아싸보다 인싸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80년 전의 뫼르소는 '아싸'의 원조였던 거다. 인싸와 아싸 둘 중에 어떤 게 절대적으로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적인 개성과 가치관의 문제이며, 사회적 관계의 서클에서 늘 상대적이며 유기적으로도 변화를 겪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싸는 관계의 중심에서 남의 시선을 즐기고 자신이 주도적 입장에 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대신에 아싸는 소외감이 주는 고독으로 인해 침잠의 세계로 들어가 자신의 내면을 여행할 수 있다. 자유로움과 해방감은 덤이다.
요즘엔 평범해도 나만의 행복과 만족을 얻으며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가는 마이사이더의 줄임말 '마싸'가 트렌드라 한다. 가치관의 다양함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 진화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의 약자)족이나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의 가치를 찾는 젊은 세대는 돈과 지위로 외부적인 성공의 가치를 따지던 구세대에는 이방인으로 보일지 모른다.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이방인. 이방인은 진화하고 있다.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는 고전 속의 이방인. 이 여름 폭염 속에서 우리의 젊은 이방인들은 무엇을 할까.
[권지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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