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부터 국립과천과학관에서 ‘과학 한국 최초의 시도들: 정보통신의 어제와 오늘’ 기획전시가 시작됐다.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울에서 열린 과학데이(과학의 날) 기념탑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사진 과천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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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못되야 저 하눌 날지 못하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햇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과학데이’라고 쓰인 흰색 탑 아래로 옛 찬송가 풍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일제 강점기이던 1935년 6월 발표된 이 노래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홍난파(1897~1941)가 작곡하고, 시인 김억(1896~?)이 작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노래다.
홍난파가 작곡하고, 시인 김억이 작사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노래' 학보. [사진 과천과학관] |
한반도의 모든 것이 수탈당하던 일제 강점기 시절, 이 땅에도 뿌리를 내리려고 몸부림치던 ‘조선 과학’이 있었다. 국립과천과학관이 14일부터 과학관 2층 한국과학문명관 내에서 ‘과학 한국 최초의 시도들: 정보통신의 어제와 오늘’기획전시를 시작했다. 광복 74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과학 한국 건설’을 위해 노력한 일제 강점기 과학운동과 과학한국 최초의 시도들을 전시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문명관 한구석 30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독립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과학데이’와 과학잡지 등 일제 강점기 시절 과학운동을 당시 발간된 잡지와 사진, 복원된 전시탑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로 알려진‘과학세계’(1925년)와 ‘과학조선’(1933)에서부터 ‘학생과학’(1965)까지 16종의 한국 근현대과학잡지와 과학 교과서들도 선보이고 있다. 1933년 5월 특집호로 발간된 신동아 과학호의‘50년 후의 세상’도 웹툰으로 만나볼 수 있다.
1925년 과학세계 잡지 창간호를 예고한 광고. [사진 과천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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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일본 내 제국대학에서 유학한 극소수의 과학ㆍ공학자들이 있었으나, 조선 땅의 과학기술은 식민지의 현실 그대로 척박했다. 하지만 1919년 3.1 운동 후 민족주의 사상이 널리 확산하면서 조선의 과학기술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근대적 산업과 함께 교육ㆍ문화를 일으키려는 한국인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했고, 그 과정에서 근대 문명의 토대로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는 게 과학사학자들의 증언이다.
과천과학관에 전시 중인 ‘과학데이’탑은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과학운동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1934년 4월19일 서울 종로의 YMCA 회관에서 제1회 과학데이 기념식이 열렸다. 요즘으로 말하자면‘과학의 날’ 행사가 열린 것이다. 당시 일간지들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800여 명의 청중으로 성황을 이뤘다. 며칠 뒤 시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열린 과학영화 상영회에는 8000명이 몰려, 그 대부분이 강당에 입장하지 못하고 되돌아 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과학관ㆍ전화국 견학, 라디오 강연 등 과학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1933년 6월 창간된 과학조선 첫 호. [사진 과천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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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태 서울대 교수(과학사)는 “1934년 봄의 과학데이 행사는 과학이 한국인의 문화에 본격적으로 뿌리 내리기 시작한 순간이라 부를 만하다”며 “나라의 부강과 독립을 위해 과학을 진흥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전부터 제기됐지만, 대중적 호응을 받은 일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당시 과학데이를 비롯한 과학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고급 과학기술자가 아니었다. 과학데이를 이끈 인물은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도자기ㆍ벽돌 제조 전문가 김용관(1897~1967)이었다. 그는 당시 재능은 있지만,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발명가들과 함께 ‘발명학회’까지 만들었다. 당시 그들의 활동은 과학잡지인 ‘과학조선’등에 남아있다.
1925년 발행된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 표지. [사진 과천과학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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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태 교수는 “김용관은 자본이 취약한 한국인 기업이 일본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한국인의 발명활동을 진작해 그 성과를 한국인 기업이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발명학회를 설립한 김용관. |
김용관과 발명학회 사람들은 발명진흥과 과학연구기관 설립을 통해 민족산업 발전을 꿈꿨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34년 시작한 과학데이 행사는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 1937년까지는 매년 성황리에 열렸지만,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식민지의 민족주의 운동이 탄압을 받으면서 과학운동은 친일적 운동으로 변질돼갔다는 게 학자들의 분석이다.
과천과학관 전시를 주도한 남경욱 연구사는“일제는 당시 한반도에 공업전문학교와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 외에 대학수준의 이공계 교육기관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며“조선의 과학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1940년대 이후부터는 과학데이와 잡지 간행을 방해하고 친일인사나 일본인이 주도하도록 바꿔버렸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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