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제주지법에서 고유정(36)의 첫 공판이 열린 가운데 시민들이 호송차에 오르는 고유정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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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을 완전히 꺾기로 했다.”
살인 혐의를 받는 고유정을 변호하려다 결국 여론의 압박으로 변론을 포기한 한 판사 출신 변호사가 남긴 말이다. 고유정을 변호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변호사는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아야 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들먹이며 조롱과 협박 글을 올렸고, 변호사의 가족 중 한 명은 스트레스로 인해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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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감내 못해"
비단 고유정 사건 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범죄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에 대한 여론의 비판은 날로 거세지는 추세다. 범죄자뿐만 아니라 그의 변호인을 향해서도 “돈만 주면 인면수심의 범죄자도 변호할 수 있는 것이냐” “돈 때문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난한다. 개인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된 만큼 변호사의 신상정보는 빠르게 퍼진다.
특히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의 경우 빗발치는 여론의 공격을 감내할만한 변호사는 많지 않다. 한 살인사건 피고인을 변호했던 변호사는 “전화, 메일,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초토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계속 손편지를 보내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다른 의뢰인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개인적으로도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사회적으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수임료를 받을 수도 있지만 다수의 변호사들은 “수임료가 아무리 높아도 여론의 마녀사냥을 감내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언론에 알려진 흉악범죄일수록 의혹과 사실이 잘 분리돼 있지도 않고, 이미 ‘사형’이 선고돼야 할 범죄자로 낙인찍힌 상태”라며 “변호사로서 당연히 피고인이 기대하는 수준의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갖은 모욕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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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억울하게, 의도치 않게 피고인 될 수 있다"
많은 변호사들은 범죄자를 변론하는 변호인을 향한 공격은 ‘스스로를 향한 공격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그 누구라도 범죄에 선을 그어 ‘여기까지는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고, 여기서부터는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누구든지 억울하게, 혹은 의도치 않게, 또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비해 과하게 범죄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유정 사건의 변호를 맡은 남윤국 변호사가 13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남윤국 변호사 블로그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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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변호사는 “변호인은 피고인의 무조건적인 ‘선처’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피고인이 억울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유일하게 편들어 주는 사람”이라며 “우리 국민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이걸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기본권을 깎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시선이지만, 사선 변호사가 여론의 압박으로 사임하면 국선 변호사의 일만 늘어난다는 지적도 있다. 국선 변호사의 취지는 경제적으로 법률 조력을 받기 어려운 사람을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인데, 안 그래도 많은 국선 변호사의 사건이 이런 일 때문에 늘어나 다른 사건의 의뢰인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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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 뭇매 맞더라도 지킬 건 지켜야"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흉악범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동력은 수임료가 아니라 법조인으로서 자기 스스로 기준을 정한 나름의 소신과 사명감일 것”이라며 “스스로 그것을 포기해야 했던 고유정 변호사의 자괴감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현 전 대한변협 회장은 “우리 변호사들이 좀 더 용기를 갖고 꿋꿋하게 사건에 임했으면 좋겠다”며 “여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오직 변호인만을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피고인을 위해,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들이 힘을 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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