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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모험하는 소녀 요리하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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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페미니스트 엄마가 추천하는 어린이책 5권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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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를 좋아하는 아들과 <첨벙!>(미디어창비, 2019)이라는 그림책을 함께 읽었다. 사진작가 하시시박이 번역한 이 그림책은, 다이빙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 엠마의 이야기다.

엠마는 길에서 작은 동전 하나를 줍는데, 보잘것없는 동전 페니 역시 다이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는다. 페니는 비록 팔다리가 없는 몸이지만(!) 다이빙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둘의 절실한 소망이 과연 어떻게 이뤄질지 궁금해하며 아이와 함께 페이지를 넘겼다. (사랑스럽고 기분 좋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그림책은, 예전에 나온 책이었다면 소년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운동을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는 대체로 남자였으니까. 소리 높여 “여자도 할 수 있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툭, 여자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이야기가 많아지는 게 즐겁다.

“성평등!” 구호 대신 ‘여성 주인공 책’



여자 주인공이 ‘원톱’으로 나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권할 수 있을까? 아들이 주인공 ‘누나’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같은 성별도 아닌데? 성별이 같아야 더 감정이입하지 않을까? 좋은 모델이 될 만한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가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차원의 검열 같은 것도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오히려 어린아이에게는 이야기는 이야기로서 다가갈 뿐, 여자 주인공이든 남자 주인공이든 크게 호오가 갈리지는 않았다.

사실 그간 여자 어린이들이 남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에 공감하는 훈련을 엄청나게 해온 것을 생각하면, 여자가 단독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에 남자아이들은 좀더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온갖 이야기에서 남자가 주인공인 것도 있고 여자가 주인공인 것도 있으니까. 아들은 “이 책에 형은 왜 안 나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헌터 걸>(사계절, 2018)은 여자아이에게 읽어주면 백발백중 빠져든다는 마성의 동화다. 히어로물이면서 열두 살짜리 여성 어린이가 주인공이고, 영화 <헝거 게임>의 캣니스처럼 활쏘기가 주 무기이며, 모험의 한복판에서 한 단계씩 성장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외할머니 캐릭터가 멋진 것도 좋았다. 이 책에서 주인공 강지의 조력자로 나오는 아빠는 딸에게 숨겨왔던 할머니의 비밀을 알려주는데, 조연에 멈추며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키우는 회사 동료는 이 책을 아이가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딸이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자라나기를 원하는 엄마들에게는, 신데렐라나 인어공주 이야기 같은 명작 동화를 읽어줄 때마다 느껴지는 난감함이 있다. <헌터 걸>은 ‘이런 내용을 아이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하고 염려할 필요 없이, 흔쾌히 딸에게 읽어줄 수 있는 책이다. 여성 히어로물 동화책이라니, 그 자체로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후속 권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재미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여성 히어로·과학자·모험담에 아들도 공감



<힐다>(찰리북, 2018)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힐다>의 원작 그림책으로, 어린이를 위한 그래픽노블이다. 북유럽 신화 내용이 포개지면서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왠지 힐링이 되면서도 여자아이의 모험담이기도 한 신기한 작품이었다. (이 느낌은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아무튼 보면 안다.) 다만 다섯 살 남아를 사로잡기에는 약간 어려워서 아들과 함께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좀더 나이를 먹으면 다시 한번 시도할 생각이다.

해양생물학자 유지니 클라크의 일대기를 그림책으로 담은 <샤크 레이디>(청어람아이, 2018)도 아들과 즐겁게, 여러 차례 읽은 책이다. 틈만 나면 백상아리, 청상아리, 귀상어, 레몬상어 하면서 상어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아이는 도서관에서 ‘상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책을 전부 찾아달라고 했는데, 이 책도 그래서 알게 됐다.

아들에게 이 책이 가닿은 것이 엄마로서 기뻤다. “엄마, 저 과학자 누나가 상어를 관찰했어? 엄청 많이?” 하면서 흥분해 묻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감탄이 묻어 있었다. 추상적이고 당위적으로 “과학자는 여자도 될 수 있어. 남자만 되는 게 아니야” 굳이 그렇게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었다. 유지니 클라크를 소개한 이 그림책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샤크 레이디>는 ‘세상을 바꾼 소녀’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에는 보스턴마라톤을 달린 최초의 여성 바비 깁에 관한 이야기 <여자도 달릴 수 있어!> 등 여러 여성 인물이 소개돼 있다. 번역서가 아닌 국내 여성 인물들에 대한 조명도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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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도 책 속 성평등… 우리 집 요리사는 아빠



그림책의 경우 이렇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도 있지만, 생활의 ‘팁’을 전해주는 교양 그림책 계열도 있다. 요리를 잘하는 소년이 라면도 못 끓이는 동네 형에게 요리 시범을 보이며 생존 요리를 가르쳐준다는 콘셉트로 쓰인 <음식 잘 먹는 법>(사계절, 2017) 같은 그림책도 재미있었다. 똑같은 내용이더라도 여자아이가 성인 남자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설정이었다면 이렇게 신선한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들도 요리를 알려주는 이 두툼한 그림책을 참 좋아한다. 글이 꽤 많지만, 전부 다 읽어줄 필요는 없기 때문에 물어보는 대로 책에 그려진 조리도구와 식재료 이름을 알려주고 조리법을 따라 읽는다. 요건 도마, 국자, 뒤집개, 거품기… 다 읽고 나면 꼭 거기 나오는 요리 중 하나를 저녁에 해달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볶음밥 같은 생존 요리에 가까운 쉬운 것이어서 큰 문제는 되지 않고 오히려 저녁을 잘 먹게 되는 효과가 있다. 아,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좋은 점은 마지막에 설거지가 나온다는 건데, 요리의 끝은 정리정돈까지라고 힘주어 말해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책으로 만나는 세상이 아무리 성평등한 것이더라도, 실제로 가정에서, 어린이집에서, 학교에서 만나는 세상이 이를 받쳐주지 못한다면 아이들의 삶에 큰 의미를 남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운동장은 뛰어야 맛이고 요리는 해야 맛이니까. 남편이 묵묵히 (생색내며가 아니라 묵묵히)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아들에게 <음식 잘 먹는 법>을 읽어준다. 만족스러운 독서를 끝낸 아들은 책 속 주인공처럼 자기가 요리를 하겠다며 나선다. 달걀을 깨서 휘젓는 두 남자를 부엌에 놔둔 채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정소영 <곰돌이가 괜찮다고 그랬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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