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일상 통해 삶의 보편성 다뤄…김보라 감독 데뷔작·각종 국제영화제 25관왕
'벌새' |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심부름하러 다녀온 소녀가 집 앞 초인종을 누르지만,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소녀는 불안해하며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지만, 끝내 문이 열리지 않자 '엄마'하고 울부짖는다. 소녀는 정신을 차리고 아파트 호수를 올려다본다. 아뿔싸, 집을 잘못 찾았다. 한층 아래로 내려와 벨을 누르자 비로소 엄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벌새'(김보라 감독)의 첫 장면이다. 14살 소녀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급작스러운 관계 단절에서 오는 공포감,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 등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 분)의 성장 이야기를 그린다. 현미경으로 보듯 찬찬히 들여다본 은희의 일상은 마치 소우주처럼 넓고 깊다. 수많은 별이 빛나고 스러지는 속에서 은희는 차츰 자기만의 빛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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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여중생이다. 공부는 못해도 만화를 잘 그린다. 집과 학교에서는 얌전하지만, 가끔 일탈도 하는 '날라리'이다.
은희네는 강남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중산층 가족이다. 아들만 바라보는 가부장적인 아빠, 떡집에 집안일까지 하느라 늘 피곤한 엄마, 공부는 잘하지만, 은희를 때리는 난폭한 오빠, 밤마다 몰래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사고뭉치 고등학생 언니까지. 은희는 제 가족을 콩가루라 부른다. 은희 곁에는 '절친'과 남자친구도 있다.
영화는 은희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랑받기 위해 부단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관계들은 견고하지 않다. 단절과 화해를 반복한다. 절친은 결정적인 순간 은희를 배신하고, 남자친구는 바람을 피운다. 그러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여자 후배는 새 학기가 되자 갑자기 등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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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사람들의 변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번씩 관계의 붕괴를 겪을 때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상실감에 몸서리친다. 만남과 헤어짐, 좋았다가 싫기를 반복하는 은희와 친구들을 '중2병'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알 것 같아도 정말 모르겠고, 나쁜 일이 닥치면 기쁜 일들이 함께하는 것"(극 중 영지의 편지)이 인생인 것처럼, 영화는 희로애락으로 가득한 소녀의 일상이 사실은 보편적인 삶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보면 '나도 저랬지' 혹은 '나라도 저랬을 것 같다'는 공감이 저절로 든다. 통찰력 있는 시선과 디테일한 연출이 더해져 설득력을 높인다.
이 작품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 제45회 시애틀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 제36회 예루살렘국제영화제 최우수 장편 데뷔작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25관왕을 달성한 것도 그런 보편성과 공감의 힘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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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좋은 어른'에 대해서도 묻는다. 극 중 나쁜 어른은 없지만, 은희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좋은 어른은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 한명 뿐이다. 아빠, 엄마조차 은희의 애타는 날갯짓을 보지 못한다. "오빠가 때렸다"고 하소연해도, 아빠는 "너희 둘이 싸우지 마라"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거나, 폭력은 절대 써서는 안 된다며 따끔하게 혼내주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런 어른들의 무심함은 폭력보다 더한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아이들은 묻는다. "왜 다들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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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1994년 억압적인 사회 공기가 그대로 담겨있어 쓸쓸함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낸다. 교실 풍경만 해도 그렇다. 담임 교사는 '날라리'를 색출한다며 친구 이름을 써내라고 하고, "노래방 대신 서울대"라는 구호를 외치도록 한다. 공부 못하는 은희를 향해 같은 반 급우는 "쟤는 커서 우리 집 파출부 될 거야"라며 대놓고 무시한다.
극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도 시선을 넓힌다. 1994년은 북한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상관측 사상 최고 찜통더위가 전국을 달궜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진 해이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후반부 자연스럽게 등장해 가뜩 미스터리로 가득한 은희의 인생에 또 하나의 물음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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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감독은 최근 시사회 후 간담회에서 "성수대교 붕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간과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지에 대해 주인공 은희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성수대교 붕괴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가 서구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하는 공기 속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그 물리적인 붕괴가 은희가 관계 속에서 겪는 붕괴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템포는 느리지만 소소한 웃음이 담겨있어 지루하지 않다. 아역 배우 박지후는 138분의 러닝타임을 거의 홀로 오롯이 이끌지만, 여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매력을 뽐낸다. 8월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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