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제74주년 광복절 축사를 하던 중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를 외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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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회단체, 심지어 여권 일각에서도 도쿄 올림픽 보이콧 얘기가 나오는데 “도쿄 올림픽에서 우호와 협력의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했고, 비가 오든 말든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No 아베’를 기치로 수만 명이 모인다는데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문재인 대통령의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대일(對日) 강경 기조를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을 벗어났다. 문 대통령이 사흘 전인 12일 “감정적인 대응은 안 된다”고 할 때 일부 기류 변화는 감지됐지만, 그 변화의 폭이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이번 경축사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은 중요 기제였다. 경축사를 관통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핵심 키워드도 다분히 일본을 겨냥한 것이었다. 지난 2일 일본의 화이트 국가(안보 우호국) 배제 직후 “일본 정부의 조치가 우리 경제의 미래성장을 가로막아 타격을 가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한 인식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직설적인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은 “국제 분업 체계 속에서 어느 나라든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평화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다.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이다. 수출 규제 조치를 두곤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는 책임 있는 경제 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거나 “우리 국민이 일본의 경제보복에 성숙하게 대응하는 것 역시, 우리 경제를 지켜내고자 의지를 모으면서도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우호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준 높은 국민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문 대통령은 일본과의 협력을 여러 번 강조했다.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안보·경제협력을 지속해 왔다”라거나 “일본이 이웃 나라에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가길 우리는 바란다”는 발언을 통해서다. 연설 후반부,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데 무슨 평화경제냐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일본 역시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 말미에 “우리 힘으로 분단을 이기고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책임 있는 경제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가 일본을 뛰어넘는 길이고, 일본을 동아시아 협력의 질서로 이끄는 길”이라고 말했다. 자강(自强)을 통한 극일(克日) 의지는 피력하되 일본을 자극하는 표현은 최대한 피한 것이다.
이날 문 대통령의 대일 메시지는 그동안에 비춰 가장 온건하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파격적이다.
2일 오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일본이 이날 오전 각의에서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한 데 따른 조치로 문 대통령은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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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달 8일 “전례 없는 비상상황으로 정치적 목적이 우려된다”(수석·보좌관 회의)는 첫 반응을 내놓은 이후, “이순신 장군과 함께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7·12, 전남 경제비전 선포식)→“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한다”(7·15, 수석·보좌관 회의)→“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8·2, 국무회의)로 이어졌다.
그러다 12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경제 보복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며 발언 수위를 확 낮췄고, 광복절 전날인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에도 행사에 참석하는 대신 페이스북을 통해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만 냈다.
이를 두고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전반적으로 경축사를 통해 대일 정책 기조를 기존의 강 대 강 대립보다는 대화와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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