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아베 정권의 한국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간의 경제 갈등이 경제 영역을 넘어서 사회·정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내 정치도 영향을 받아 ‘토착왜구’를 둘러싼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일 관계는 늘 국민감정과 연결되어 있어서, 휘발성이 큰 이슈다. 스포츠에서 국제정치까지 한-일 관계는 민감한 영역이다. 과거 청산이 양국에서 또한 양국 간에 말끔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다. 최근 아베의 도발에 의해 한-일 관계는 또다시 폭발적인 이슈가 됐다. 더구나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라 더더욱 민감한 사안이 됐다. 이런 점은 여러 차례 <한겨레> 보도에서도 잘 다뤄졌다.
경제 갈등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소되거나 약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더 나아가 일본은 한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이제 한국이 일본이 지금까지 보여준 경제, 정치와 사회 변동의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이 겪은 사회 변동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전후 일본의 놀라운 성장으로 1970~80년대 일본은 서구 학계의 관심 대상이 되어 ‘발전국가론’ ‘도요타 생산방식’ ‘일본식 경영’ 등 일본 특유의 국가주도 산업화와 기업 경영 방식을 둘러싼 이론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일본은 급격히 만성적인 경제침체에 빠지면서,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총생산이 1995년과 2015년 거의 똑같은 수준을 보이면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아직도 물가가 계속 하락하는 디플레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비 위축으로 인한 내수 부족이 지속되면서, 사회경제 시스템은 더욱 쇠락하고 있다.
핵심적인 원인은 복지제도의 미비에 있다. 일본은 60~70년대 경제성장을 겪으면서 고령화와 저출산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제1의 목표로 내세우며 다른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같은 시기 비슷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스웨덴이나 독일과는 달리 복지는 낭비적인 요소로 생각하여 경제 대국 가운데 가장 후진적인 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수명은 남자 81.25살, 여자 89.32살로 모로코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그러나 노령연금제도가 취약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저축을 통해서 스스로도 노후를 준비해야만 한다. 60살 퇴직 후 20~30년의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2017년 전체 인구의 27.7%가 65살 이상 고령인구가 되어, 전체적으로 생산력과 소비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90년대부터 현재까지 만성적인 경제침체를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위기도 겪고 있다. 일본은 2000년대 3만불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피고용자 5명 중 2명이 비정규직인 나라가 됐고, 7명 가운데 1명이 빈곤층이어서, 빈곤과 불평등이 심각한 ‘격차사회’가 됐다.
일본의 복합위기는 무능한 정치의 산물이었다. 일본 출신 경제학자로서 런던경제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한 미치오 모리시마 교수는 1999년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라는 책에서 일본의 위기가 3무의 정치(무신념·무정책·무책임)로 특징지어지는 일본 정치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들이 사회 변동에 대한 불감증을 가지고 있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다. 국민은 교육에 관심을 잃어 대학 진학률이 떨어지면서 일본이 활력을 잃었다는 진단도 나왔다.
안타깝게도 한국이 일본의 길을 뒤쫓아 왔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그대로 답습했다. 경제성장은 계속되지만, 저출산, 고령화, 높은 자살률, 높은 비정규직 비율, 극심한 젠더 격차, 빈곤과 불평등 심화 등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 갈등이 해소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길’과는 다른 새로운 ‘한국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보다 더 삶의 질이 높은 나라, 인권이 더 잘 보장되는 나라,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나라, 더 활력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길’이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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