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정부는 지난 5일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일본의 수출제한 3대 품목을 포함한 100개의 전략적 핵심 품목에 집중 투자해서 5년 안에 해당 품목의 공급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내용이다. 사업비 신청 기준으로만 7조8천억원을 투입하는 계획으로 각종 세제혜택과 금융지원까지 합하면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갈 것이다.
대책의 뼈대는 대기업·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민간기업의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는 것이다. 소재·부품의 대외의존도를 낮추고 자립도를 높이는 일이 국가적 의제로 부상한데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전쟁 등 보호주의가 강화되는 추세에서 정부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선회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다만 그동안 정부가 추진한 대형 국책 사업의 경우에 주도하는 대기업과 그 산하의 중소기업들로 구성되어, 일부 기업만 성과를 향유하고 제대로 확산이 안 되는 문제가 지적돼왔다. 또한 국내총생산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온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베 신조 정부에 허를 찔린 뒤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서고 있지만, 사실 잘못이 정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수출규제의 주요 표적이 된 삼성전자는 지난 몇년간 주주환원이라는 명목으로 자사주를 매입하여 소각하는 데에만 20조원 이상을 썼는데, 오래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의 소각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훨씬 더 크다. 대기업·중견기업 할 것 없이 자사주 매입 규모를 늘려가는 최근의 추세는 우려할 만하다. 영업이익의 많은 부분을 소유지배구조 강화와 주주환원에 치중하여 배분하겠다는 것인데, 도전적 투자와 인재 양성에 소홀하면 오래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한국식 오너 경영의 장점은 장기적 안목의 투자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실상은 단기적 이익 실현과 재무관리의 유연성을 중시하는 영미식 전문경영 행태를 쫓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한편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하청에 의존하는 중소기업들은 항상 단가인하 압력과 기술탈취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생태계에서는 연구개발을 통한 자발적 혁신 유인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중소기업 1곳당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계속 줄어들고 있어서, 2007년 1곳당 6억3천만원에서 2017년에는 3억4천만원으로 축소됐고 연구개발 종사 인력도 같은 기간에 8.3명에서 4.3명으로 크게 줄었다. 정부가 중소기업에 연간 4조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해도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항상 부족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이번 수출규제 사태를 국가 연구개발 투자 시스템을 개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일 관계의 특수성에 비추어 일단 정부가 발표한 대책을 밀고 나가되, 장기적 안목에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대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실 그동안 산업정책은 대부분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산업정책이든 혁신정책이든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즉,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걷어 할 일은 기존의 반도체 회사를 돕는 게 아니라 앞으로 반도체 업종을 업그레이드할 인재에 투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 전문가는 한국 기업의 문제가 개념설계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지적한다. 개념설계의 능력과 의지는, 나와 내 주변이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탄탄한 수준의 기초과학이 개념설계 능력을 받쳐주어야 한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으려면 기초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이 충분히 많아야 한다. 정책당국자는 임기 중에 약간의 성과를 내면서 책임을 면하려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학이나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과학자가 자율적으로 과제를 선정하고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연구개발의 성과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산학협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
내수시장이 작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제조업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인구구조의 변화 때문에 당장 2020년대 중반부터 청년 인력이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에서 중소기업의 엔지니어에 이르기까지 인력 부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 대책이 차근차근 준비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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