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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조한욱의 서양사람] 잊지 못할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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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어느 금요일 늦은 시간에 도서관을 나서다가 한 사람을 마주쳤다. 독일 현대사와 관련된 세미나로 많은 가르침을 준 데이비드 크루였다. 캐나다 출신으로 아이스하키 선수였어서 그런지 아주 크지는 않더라도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인데, 대략 20권은 족히 넘을 책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도서관을 나서고 있다. 도움도 거절한 그는 여기 도서관에 이런 자료들이 있는 줄 몰랐다며 흥분에 들떠 주말에 읽어야겠다고 한다. 존경의 마음과 함께 좌절감도 찾아왔었다. 저런 학자가 저렇게 공부하는데 어떻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그가 텍사스로 부임한 첫해인 1984년에 열린 대학원 세미나는 훌륭했다. 세미나는 엄선한 읽을 자료로 채워졌다. 매주 과제로 주어진 서평을 돌려받을 때면 모두가 긴장했다. 제출한 글보다도 더 긴 코멘트를 빨갛게 달아 일일이 돌려주며 어눌하지만 진지한 말투로 개선점을 지적해주었던 것이다. 한 학기 정도가 지난 뒤,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판화 순회전시회가 미술관에서 열렸다. 그 그림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설명하는 특강이 있었다. 강사가 크루였다. 말은 어눌했다는 내 기억과 달리 내용과 표현 그 어느 곳에서도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강의가 내 귀에 놀라운 즐거움을 전달했다.

지금도 텍사스주립대학교에서 그는 뛰어나게 강의를 잘하는 교수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연구의 영역에서도 그는 전에 내가 알던 크루가 아니었던 것이다. 코넬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루르 지방의 한 마을>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언 커쇼, 제프 일리 등과 함께 독일 사회사 부분의 선두를 달린 학자로만 알고 있었다. 오늘날 그의 연구 영역은 20세기 독일과 유럽의 대중문화와 소비문화, 기억의 역사학과 정치학, 20세기 독일의 영상기록물 중에서도 특히 사진의 역사로 확대되어 있다.

70대 중반의 그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옛날 도서관 앞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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