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문학평론가
내 오랜 기억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 꽤 많은 어른들이 낯선 깃발을 들고 행진하며 만세를 외치는 함성의 행렬이었다. 그 시위의 뜻을 실감한 것은 새 학기가 되면서였다. 등사판으로 급히 만들어졌을 교재를 놓고 우리말로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지난 학기 무심코 쓴 조선말 한마디 때문에 뺨 맞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해방이 됐고 독립한 것이었으며 내 이름을 찾고 우리말로 공부하며 훗날의 김현의 말대로 기표와 기의가 같은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첫 ‘한글 세대’가 된 것이었다. 나는 조금 알던 일본 말도 곧 잊었고 반일 교육을 받으면서 저절로 일본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다.
10년 전쯤 한국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재일동포 문학인 안우식 선생이 일본 문학비평가 한 분을 소개했다. 신후네 가이사부로씨는 한국의 문예 동향에 이어 한일합병 1세기에 관한 내 의견을 듣고 귀국 후 자신의 소감을 엮은 글을 발표했다. ‘36년간의 수난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란 제목의 글을 번역으로 읽다가 문득 그가 ‘이야기를 듣다 말고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했다’란 구절을 만났다. 우리가 일본 식민지가 되어 제도가 바뀌고 새로운 문명의 설비가 이루어졌다는 내 말을 듣자, 의외의 답변에 놀라 그의 표정이 환해지던 기억이 회상됐다. 내 대답을 그리 바꾸지 않은 그의 글은 내 어조가 바뀌고 있음도 바로 이해했다. 일본이 조선 땅에 새로운 제도와 문명을 들여온 것은 물론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효율적인 식민 경영을 위해서였다고 나는 강조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식량을 가져가기 위해 척식회사를 만들고 그 관리를 위해 최소한의 교육을 한 것이다. 그의 글에 인용된 예는 교육에 대한 내 소견이었다. ‘일본 문부성은 한반도에 근대교육을 실시했으나 한글 교육은 전면적으로 말살했다. 민족 정체성을 허용치 않는 교육을 한 것이다.’ 일본인은 한반도의 근대화 정책을 시혜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식민통치의 기법과 착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시책이란 내 지적을 그는 부인도 못 했지만 수긍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 위기, 선택, 변화> 294쪽에는 독일 <슈피겔>의 표지 사진이 전재된다. 1970년 12월 서독 브란트 수상이 무릎 꿇고 속죄의 묵념을 드리는 모습이다. 이 사진 밑에 ‘현대 독일사의 결정적인 순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를 방문했을 때 무릎을 꿇고 나치의 전쟁 범죄를 인정하며 폴란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란 설명이 붙었다. 그리고 같은 쪽 본문에서 다이아몬드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행동은 가해국의 지도자가 큰 고통을 당한 피해국의 국민에게 보낸 진심어린 사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에게, 일본 총리가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스탈린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에게, 드골이 알제리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한 적이 있었던가?’라고 묻는다.
<총, 균, 쇠>로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낸 바 있는 다이아몬드는 올해 간행되고 우리에게도 번역된 이 책에서는 미국 등 다른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을 대상으로 그들 근대화의 역사와 그 와중에 부닥친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했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일본을 여러 차례 비판한다. 가령 독일이 ‘강제수용소를 견학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직시하는 현상을 당연하게 여기며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 없이 속죄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과거의 전쟁 범죄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1910년 한국을 합병했고 한국 학교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따라서 35년의 강점기에 한국 학교는 일본어로 가르쳐야 했다. 일본은 한국인 여성과 다른 국적의 여성에게 일본 병사들을 위한 성노예로 일하도록 강요했고 한국인 남성은 일본군대에서 사실상 노예 노동자로 일했’음을 분명하게 짚고 있다.
‘일본의 역사 시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의 다루지 않’음을 밝힌 다이아몬드는 ‘독일은 나치의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이웃 국가인 폴란드, 프랑스와 원만하고 정직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과 중국에 보여준 일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고 지적하면서 ‘하시모토는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 지도자에게 원하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 사과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과거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싱가포르 리콴유의 말도 옮긴다. 세계 3위의 경제부국인 일본과 4위인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같은 전범국이지만 두 나라의 오늘의 위세에서 일본이 좀스러운 소국 근성을 못 벗어난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일본이 속죄를 모른다는 것,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거나 사과하지 못한다는 것,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 등등의 태도가 ‘일본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짚는다. 일본은 더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자초한 원폭 공격을 받고 항복했는데 그것을 빌미로 스스로를 원폭 피해자로 강변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란 혐의를 피하고 있다. 이 자기기만에 대해 최정호 선생이 여러 차례 강경하게 비판했지만 다이아몬드도 ‘일본은 원자폭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자기연민에 허우적댈 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며 ‘이 태도는 한국이나 중국과의 관계회복에 악영향을 미치고 이는 결국 일본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내다본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역사를 향해 3·1운동으로 민족적 각성을 하고 분단과 전쟁, 정치경제적 후진 상태로 뒤처진 후 4·19와 5·16, 5·18과 6·29로써 통절한 자기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과 전범의 죄과를 ‘원폭 피해자’로 역사의 신분 세탁을 하면서 잘못을 과거에 묻고 그 반성 없이 속죄의 절차를 건너뛰었다. 그들로부터 피해와 수치를 당해온 우리가 몇 차례의 시민사회적 치열한 참회 과정으로 과거를 극복하는 동안 그들은 자기기만으로 자신들의 죄업을 증거하는 ‘평화의 소녀상’마저 전시장에서 철거하는 반문화적·반지성적 폭거까지 저질렀다. 같은 문화권의 인접국에 치욕을 가한 제국주의의 정신사적 속죄 없이 그들은 죄악의 역사를 당당한 경제대국의 위세로 호도한 것이다. 역사의 성찰은 과거의 극복을 위한 고회이고 현재의 확인을 위한 고심이며 미래의 선택을 위한 고민이다. 그 역사 인식 행위는 호모 사피엔스로서 가장 정직하고 지적인 행위다. 다이아몬드가 바라본 일본의 위기는 분명 그 몰역사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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