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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부품·소재 脫일본 5大 전략-소재강국 10년 로드맵 마련·수입선 다변화 과학기술 인재 우대…‘사(검사·판사·변호사·의사 등)’자 쏠림 뿌리 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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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하지만 무작정 두려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재계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국내 주력 산업 대부분이 규제 영향권에 들어가는 만큼 주요 기업은 모두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시나리오별로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한편, 주요 부품·소재 재고 확보에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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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어떻게 대응하나

▷일제히 비상경영 체제 돌입

한국화학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주요 소재 상당 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한다. 반도체 기초 재료인 실리콘웨이퍼는 일본 기업이 세계 시장 53%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의 카메라에 주로 사용되는 이미지센서 역시 소니 제품이 절반 이상 차지한다. 중소형 OLED 디스플레이 패널 제조에 쓰이는 핵심 부품 섀도 마스크(Fine Metal Mask)는 100% 일본에서 수입한다. 2차 전지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도 아사히카세이(17%), 도레이(15%), 스미토모(6%), 우베(6%), W-SCOPE(6%) 등 일본 기업이 전체 시장의 50% 이상을 책임진다.

여러 분야에서 피해가 예상되지만 무작정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5가지 ‘탈일본 전략’을 통해 국내 기업 자생력을 키우고 일본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5가지 전략은 기술 독립, 주요 부품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대중소 협업 체제 강화, 과학 인재 확보, 적극적인 인수합병(M&A) 등이 꼽힌다.

5가지 脫일본 전략 살펴보니

▶대체 가능 기술부터 독립

▷삼성·SK 중심 국산화 박차

기술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당장 가능한 품목부터 기술 독립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일단 실리콘웨이퍼는 SK실트론의 기술 수준이 높아 어느 정도 일본산 대체가 가능할 전망이다. 고순도불화수소(HF) 역시 SK머티리얼즈가 올해 하반기부터 생산할 계획이다.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은 아직 일본 업체 점유율이 높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 자회사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고품질 분리막을 생산하고 있다.

수소차 개발에 필요한 대표적인 소재 탄소섬유에 대한 국산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탄소섬유는 머리카락 10분의 1 굵기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닥을 모아 굳히면 금속 이상의 강도를 낼 수 있는 소재다. 철보다 4배 더 가볍고 같은 무게라면 10배 더 단단해 무게와 내구성이 중요한 수소차 연료탱크의 필수 소재로 쓰인다.

국산 탄소섬유는 가격 경쟁력이나 품질 면에서 일본의 80% 수준이지만 점차 격차를 좁히고 있다. 국내 유일한 탄소섬유 생산업체인 효성은 일본산 탄소섬유 수입이 막히는 상황에 대비해 생산 설비 확대 검토에 나섰다. 6개월 이내에 국산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 분석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도 일본에 의존하는 부품·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대기업 주도로 ‘10년 로드맵’을 만들고 독립 가능한 품목을 정해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매경이코노미

▶주요 소재 수입선 다변화

▷2011년 자동차 부품업계 사례 교훈

“2011년 당시 동일본 지진 영향으로 일본 자동차 부품 수급이 어려워졌다. 그때부터 국내 업계는 ‘탈일본화’를 추진했다. 이 때문에 자동차 부품 업계는 일본 수출 규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자동차 부품 업계 한 관계자의 얘기다.

일본에서 수입하던 모든 부품·소재를 한국이 생산할 수는 없다. 기술 독립이 가능한 분야는 그대로 추진하면서 동시에 자동차 부품 업계처럼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최근 벤처기업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 화이트리스트 제외에 대한 기업 대응책으로 ‘수입선 다변화’를 꼽은 기업인이 가장 많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은 일본산 외에도 여러 소재나 부품 테스트에 착수했다. 순도 ‘99.9999999999%’로 알려진 일본의 고순도불화수소 제품과 같은 수준의 품질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충분히 다른 나라 제품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령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 최고 기술로 꼽히는 것은 EUV(극자외선) 장비다. 7나노 공정에 들어가는 핵심 장비인 EUV는 포토레지스트라는 재료를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는 전량 일본으로부터 수입했다. 수출규제 이슈가 맞물리면서 삼성전자는 벨기에 등으로부터 포토레지스트를 어느 정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인지 최근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 품목으로 꼽혔던 EUV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한국 수출을 허용했다.

▶ 대중소기업 공동 대응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

반도체·디스플레이에 이어 또 다른 피해가 우려되는 분야는 전기차 배터리다.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글로벌 톱 수준 시장점유율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핵심 부품은 여전히 일본 수입 비중이 높다.

배터리 원가의 15%가 넘는 핵심 소재인 분리막 시장에서 글로벌 2위 업체인 SK이노베이션은 최근 국내 업체에 해당 소재를 공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기술유출 건을 놓고 LG화학과 소송을 벌이고 있지만 국익 차원에서 LG화학에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간 협력뿐 아니라 대중소기업 협력도 중요하다. 일본 의존도가 거의 100%에 이르는 파우치 필름이나 양극·음극 바인더 등은 대체품 찾기가 쉽지 않다. 율촌화학과 BTL첨단소재 등 일부 국내 기업이 파우치 필름을 만들고 있지만 일본 업체와 기술 격차가 커 실제 적용에는 3년 이상 소요될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가 소재·부품·장비산업 육성을 위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중소기업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정부는 R&D(연구개발) 비용을 지원하고 대기업은 국내 기업이 만든 소재를 의무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M&A 추진

▷기술만 괜찮다면 비싸게라도…

소재·부품 탈일본을 위해서는 과감한 M&A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당장 중국만 하더라도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M&A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핵심 소재 국산화 작업이 만만찮은 만큼 M&A와 같이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설득력 있다.

정부 또한 이에 동참하고 나섰다.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해외 M&A 인수금융 지원협의체를 구성했다. 총 2조50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자문이나 컨설팅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러시아 등 소재·부품 기술 선진국과의 기술 제휴와 라이선싱, 원천기술 도입 등도 진행할 예정이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기업분석부 부서장(이사)은 “지금까지 시장 규모가 협소해 잘 진행되지 않던 소재·부품 R&D가 정부 지원으로 탄력을 받을 것”이라면서 “기술이 확실한 해외 기업은 비싼 가격에라도 인수하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핵심은 인재 양성인데

▷이공계 활성화 국가가 나서야

0명.

한국의 노벨과학상 배출자다. 일본은 물리학상 11명, 화학상 7명, 생리의학상 5명으로 23명(일본계 미국인 포함)에 달한다.

모든 기술은 인재로부터 나온다. 지난 30년간 해마다 과학 인재의 중요성은 되풀이됐지만 바뀐 것은 없다. 산업계와 정부가 적극 나서는 것은 물론, 학계가 탄탄하게 뒷받침해줘야 부품·소재 강국이 될 수 있다. 일본은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탄탄한 산학연 융합연구를 바탕으로 소재·부품·장비 등에서 힘을 발휘한다.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는 논문과 특허 숫자에 매몰돼 소위 ‘연구를 위한 연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산학연 융합연구가 활발하지 않아 ‘기초 → 응용 → 연구개발’의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해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이 동시에 미달됐다. KAIST 등 4개 특성화대도 처음으로 수학·물리 등 4개 기초과학 전공에서 지원자가 감소했다. 인재 양성과 기초과학 발전 없이 부품·소재 독립은 요원할 수 있다.

▶정부 역할 중요한데

▷기업 정책 기조 대전환 필요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45조3000억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국산화하는 ‘탈일본 대책’을 내놨다.

산업 현장과 학계에서는 정부 대책에 기대를 나타내면서도 구체적인 실효성에는 여전히 의문을 표한다. 일부 연구·학계 전문가는 정부 대책이 세심한 설계를 거치지 않고 선포된 탓에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석준형 한양대 특임교수는 “일본의 소재 기술력은 100년 가까이 된 대기업들이 소재 하나만 바라보고 얻어낸 높은 기술력”이라며 “국산화라는 의도는 좋지만 단기간 R&D에 투자해서 이뤄내기는 어렵다. 체계적인 장기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단순히 R&D 예산만 대폭 늘린다고 기술 독립이 가능하지는 않다. 단기간에 보여주기식 양적 성과만 추구하는 투자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제대로 된 기술 하나 개발조차 어렵다. 일각에서 출연연구소·국공립연구소 대신 민간 과제를 중심으로 지원금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국 기업이 일본과 싸워 이기려면 기업의 족쇄를 푸는 ‘정책 대전환’이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준비 안 된 근로시간 단축, 산업안전법과 화학물질관리법 등 규제 사슬을 걷어내야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장지상 산업연구원장은 “소재 기술 확보를 위해 우수 인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 52시간 근무제를 해당 산업 분야에 한해 면제해야 한다”며 “정부가 장기적으로, 기술 개발하는 중소기업이 대학·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협력해 소재를 만들고, 대기업이 이를 사용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 |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모든 소재 ‘국산화’ 불가능…핵심소재 ‘선택과 집중’

매경이코노미

Q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소재·부품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A 반도체 분야에서는 장비나 마스크 기판, 실리콘웨이퍼 등의 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중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는 부품도 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은 일본 외에 다른 국가에서 공급받는 방안, 국내 업체와의 협력 등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Q 지금 당장 필요한 부품·소재 공급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앞으로가 문제다.

A 일본 수출규제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면서 국내 업체의 부품·소재 공급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필수 소재에 대한 국산화를 진행하면서 해외 수입처 다변화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모두가 국산화를 얘기하지만 모든 것을 국산화할 수 없을뿐더러 국산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도체·디스플레이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만큼 1등 제품이 아니면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결국 공급망을 다양화하고 가능한 분야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Q 국내 업체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A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인데 연구개발 예산을 늘리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 가령 반도체 미세화 공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고, 기존과 다른 장비나 부품이 요구된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테스트베드를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정부가 나서서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 제품을 대기업이 구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국가 소재·부품·장비 핵심 기술 지정이 필요하다.

Q 인력 확보도 중요한 문제일 듯싶다.

A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서는 주요 대학 교수를 기업 연구개발센터에 파견할 수 있게 하는 법적 기반이 필요하다. 일본만 해도 집단 연구를 통해 정밀화학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도 대규모 사업단 구조로 대기업과 연결할 수 있는, 대기업이 참여하는 중소·중견 R&D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박영선 인턴기자 9mi9m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21호 (2019.08.14~2019.08.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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