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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한일 최악의 경제전쟁 日 화이트리스트 배제 극복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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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부당한 보복 조치에 단호하게 대응해나갈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이 한일청구권협정 위반 행위를 일방적으로 진행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파장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정부는 곧장 ‘단호한 대응 방침’을 내비치면서 예산, 세제, 금융 등 가용수단을 총동원해 방어막을 치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기업들은 끙끙 앓는 모습이다. 핵심 소재를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온 만큼 당장 국산이나 다른 국가 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보복 여파로 기업 실적이 악화될 경우 한국 경제가 위기에 직면할 우려도 크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2%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비관론도 팽배하다. 코스피, 코스닥지수가 급락하고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떨어지는 등 금융시장도 공포에 휩싸였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한국 경제는 이대로 주저앉는 것일까. 기업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일까.

매경이코노미

文 “무역보복 명백” 가용수단 총동원

부품·소재 국산화 大–中企 협력 절실


일본이 결국 칼을 빼들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규제에 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하는 경제보복을 감행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8월 2일 각의(국무회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오는 8월 28일부터 시행된다.

이 조치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하는 1100여개 품목의 수출 절차가 개별허가제로 전환된다. 식품,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이 일본 경제산업성의 수출허가 개별심사를 받는다. 2004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 포함됐던 한국은 리스트에서 빠지는 첫 국가가 됐다. 우리 기업으로서는 핵심 품목 조달이 까다로워지면서 생산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커졌다. 연간 100조원 이상 교역을 하는 양국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경제전쟁’에 돌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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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5일 오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일본의 무역보복을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경제를 넘어설 더 큰 안목과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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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100대 품목 국산화 나서기로

소재·부품 R&D에 7조8000억 투자

당연히 우리 정부는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명백한 무역보복”이라며 “한국 경제를 공격하고 미래 성장에 타격을 가하겠다는 일본의 분명한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 정부도 화이트리스트에서 일본을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관광, 식품, 폐기물 등의 분야부터 안전조치를 강화해나가겠다는 계획도 내비쳤다.

구체적인 대책도 내놨다.

정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기초화학 등 6개 분야 100대 핵심 품목 국산화에 나서기로 했다. 고순도불화수소 등 안보상 수급 위험이 큰 20대 핵심 품목은 1년, 자립화에 시간이 필요한 80대 품목은 5년 내 공급을 안정화하는 것이 목표다. 핵심 기술 확보를 위한 R&D(연구개발) 투자도 활성화한다. 내년부터 2026년까지 향후 7년간 소재, 부품, 장비 R&D에 매년 1조원 이상씩 총 7조8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해외 소재·부품기업 인수합병(M&A)을 독려하기 위한 자금도 2조5000억원 이상 지원한다. 국세청도 일본 수출규제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에 대해 세금 납부 기한을 연장하고 세무조사를 유예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 대책이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정부가 대규모 예산을 쏟아부어도 단기간에 주요 산업 핵심 소재·부품, 장비산업 경쟁력이 높아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일 무역적자 241억달러 중 소재, 부품, 장비 적자가 224억달러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일본과 거래하는 중소 제조업체 269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의 59%가 ‘6개월도 버티기 어렵다’고 답했다.

일본 경제보복 악재로 당초 2%대 초중반으로 예상되던 한국 성장률이 2%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일본 수출규제로 한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0.27~0.44%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로 올해 한국 반도체 생산량이 10% 줄어들 것이라고 가정한 결과다. 일본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는 반영하지 않아 향후 GDP 전망은 더욱 암울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스탠다드차타드(1%), IHS마킷(1.4%), ING그룹(1.4%), 모건스탠리(1.8%) 등 주요 금융회사가 올해 한국 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으로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 경제보복을 ‘전화위복’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산업 현주소를 점검하고 각종 경제정책, 규제를 대수술해 한국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규제를 대폭 풀어 이참에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자유무역질서를 위협할 뿐 아니라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을 교란할 수 있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적극 주장해야 한다. 주요국은 물론 WTO 등 국제기구 대상으로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절실하다”는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주장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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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들던 일본 왜 조용하나

통상적인 행정절차 부각 ‘전략적 무대응’

도쿄 = 정욱 특파원 wook@mk.co.kr

우리 사회가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들끓고 있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점차 관련 뉴스를 접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고위 관료들의 관련 언급을 날로 줄이고 있다. 언론에서도 관련 뉴스는 한국이 내놓은 대책 소개나 소녀상 전시 중단이 불러온 표현의 자유 논쟁 정도가 전부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발언을 줄이는 것은 이번 조치가 ‘한국의 부실한 수출 관리에 대한 통상적인 행정 절차’란 점을 국내외에 부각하기 위해서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이 없으며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도 아니란 것이다. 지난 8월 2일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이뤄진 후 경제산업성에서 전략물자 수출 관련 제도를 소폭 수정한 것도 여론전을 위한 포석으로 평가된다. 경제산업성은 화이트, 비화이트로 구분했던 기준을 A~D로 바꾼다고 결정했다.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표현이 주는 부정적 어감을 줄이기 위한 조치다. “한국은 B등급으로 조정되지만 대만·싱가포르를 비롯한 주요 아시아 국가가 속한 C그룹에 비해서는 여전히 우대국”이라는 점을 집중 부각했다.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인한 한국 측 피해 역시 크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공포한 8월 7일에는 개별허가 대상인 포토레지스트(PR·감광제)에 대해서도 수출을 허가했다. 7월 4일 PR을 비롯한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가 시작된 후 처음이다.

당초 3개월까지 걸릴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1개월 만에 서둘러 내주는 방식으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수출규제란 근거 없는 주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수출허가를 했다는 점을 공개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지속된 설명 덕에 ‘통상을 외교·역사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니냐’던 일본 내 비판 여론 역시 날로 줄고 있다. 산케이신문이 지난 8월 6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에 지지한다’는 답변이 67.6%에 달했다.

서울지국장을 지낸 일본의 중견 언론인은 “한국과 일본 국민 사이에서 이번 조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양국 간 문제 해결을 위한 접점 마련도 어려워지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 정부가 강경한 대책을 쏟아낼수록 일본 내 여론은 더욱더 한국에서 등을 돌리고 일본 정부가 대화에 나설 가능성도 낮아지고 있다. 우리 정부가 모든 옵션을 놓고 면밀한 검토를 하고 있겠지만 좀 더 냉정한 대응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고민해볼 때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배준희·강승태 기자, 박영선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21호 (2019.08.14~2019.08.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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