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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정글같은 통상환경…WTO체제도 위협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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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금 글로벌 통상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존 통상의 틀을 넘어선 선제적 대응이 절실합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7일 한국국제경제법학회, 대한변호사협회 주최로 열린 통상아카데미 강연에서 최근 미·중 무역분쟁 격화와 한일 간 무역보복이 잇따르는 통상 환경을 우려하며 이같이 밝혔다.

유 본부장은 "지금은 단순한 보호무역 수준을 넘어서 사문화된 조항이나 없던 조항들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 본부장은 "기존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 체제나 각국 간 양자 관계 모두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룰이 지배하는 세계화 시대에서 분절화·파편화·블록화된 시대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쏘아 올린 미·중 무역분쟁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고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들도 빗장을 걸어잠그며 자유무역 질서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도 3년 넘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외교적 갈등에서 옮겨붙은 한일 간 무역분쟁까지 악화일로를 걸으며 글로벌 밸류체인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미국은 중국은 물론 EU, 일본, 멕시코 등과도 전선을 확대해왔다.

현재 미국은 멕시코와는 새로운 무역협정을 타결 지었지만 중국, EU, 일본과는 무역협정의 판을 새로 짜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제조2025 정책을 겨냥한 미국의 압박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유 본부장은 "미국은 반도체, 네트워크 장비, 슈퍼컴퓨터, 드론 등 중국의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견제하고 있다"며 "중국의 산업 성장을 이끄는 핵심 장비에 대한 수출통제를 통해 중국과 디커플링(탈동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생산기지나 우회 수출 거점으로 활용된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타깃으로 삼을 정도다.

유 본부장은 "이제 대미 무역수지 흑자를 기뻐하기보다 대규모 흑자가 위협 요소가 되진 않을지 선제적으로 점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은 프랑스나 인도를 향해서도 301조로 통상 압박을 하고 있다.

한일 간 무역분쟁은 아시아를 넘어 반도체 등 전 세계 핵심 산업 밸류체인에 또 다른 '화약고'가 되고 있다. 지난달 1일부터 난타전을 벌이고 있는 한일 양국은 좀처럼 해결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유 본부장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기업들 시간과 비용 부담이 증가했고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도 저해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현재 대내적으로는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대책을 추진하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WTO 제소와 함께 국제 여론전에 집중하고 있다.

유 본부장은 "이제 기업들도 효율성과 경제성만 생각하기보다는 안정성 확보가 최우선 과제가 됐다"며 "기존 규범에선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이 같은 리스크를 헤징하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각국이 이처럼 '마이웨이'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통상 중재자'로서 WTO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

유 본부장은 "WTO는 일부 분쟁 해결 기능을 제외하면 협상이나 규범 제정 기능이 많이 축소됐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이 같은 통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무역협정(FTA) 2.0'을 추진하고 있다.

유 본부장은 "혁신, 확장, 활용이란 측면에서 FTA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며 "통상분쟁의 위험이 있는 품목들은 시장 다변화 등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신남방, 중남미 등 새로운 FTA 시장을 개척하는 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성이 지배하는 글로벌 통상에서 유 본부장은 선제 대응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다. 유 본부장은 "그 어느 때보다 통상이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더 이상 우리도 외부의 규제가 나오고서야 대응하는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측하지 못했던 일본의 수출통제로 국내 전 산업의 불안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선제적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유 본부장은 "통상의 흐름을 미리 읽고 글로벌 공급망상 문제가 예상되는 분야에선 제도 개선이나 산업구조 변화로 리질리언스(회복력)를 키워두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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