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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아침을 열며]애국과 민족주의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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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앤장은 강제징용 소송에서 일본 전범 기업 대부분을 변호한다. 이들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해외 먹튀 사건, 쌍용차 회계조작 사건에서 각각 옥시, 론스타, 쌍용차 등을 대리했다. 자본과 기업 편이다. 국적을, 애국을 따져 물을 일도 아니다. 돈만 벌면 된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이다.

경향신문

누군가는 국적과 애국을 내세운다. 갑질과 불공정 행위로 악명 높던 이랜드는 애국 마케팅 홍보에 들어갔다. ‘태극 물결 챌린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태극기 게양 사진을 올리면 건당 815원을 독립유공자유족회에 기부하는 이벤트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기업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부추긴다는 공덕역 부근 경의선 용지 상업 개발을 포기하는 ‘좋은 일’을 할 리도 없다. OK저축은행은 ‘OK대박통장815’ 특판 상품을 내놓았다. 한국 금융자본주의는 광복절을 연계한 ‘대박’도 판매한다. 애국이냐 이적이냐의 이분법을 강조한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가족의 사모펀드 논란에서도 지극히 한국적인 자본주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다국적기업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배제 결정 전후 애국의 최전선에 선 기업이 됐다. 소설 <토정비결> 작가 이재운은 “한·미·일·중 4국이 펼치는 반도체 세계대전에서 우리 한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제독을 먼저 떠올리듯 백년이 지난 어느 자리에선가 누가 21세기 초의 반도체 전쟁을 이겼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삼성과 하이닉스를 말할 것”이라고 썼다. 지금 한·일 갈등이 ‘반도체 전쟁’이라면,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3개국의 삼성전자 공장은 노동 착취와 노조 파괴가 벌어지는 군수 공장일 것이다.

여야와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이 싸우는 듯하지만 의견 일치를 본 게 있다. 보수 쪽은 이참에 ‘기초체력’을 튼튼히 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주문한다. 정부도 이번 사태가 ‘재난’에 준한다며 특별연장근로 방안을 내놓는다. 신규 화학물질의 신속한 출시나 인허가 기간 단축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정부 소유 통신사는 ‘반도체 산업구조 선진화 연구회’가 낸 보고서를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어려운 이유는 불산공장 환경규제 때문’이라는 제목을 달아 내보낸다. 불산 때문에 노동자들이 숨진 사건은 망각된다.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배상 문제로 불거진 한·일 경제 갈등인데 정작 노동은 뒤로 밀려난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일본의 야만적 제국주의 피해자이면서 착취와 수탈의 자본주의 피해자였다. 지금 여기의 노동자들은 어떤가. ‘2018년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산재 사고 사망자와 질병 사망자는 2142명, 산재를 당한 전체 노동자는 10만2305명이다. 정부가 실태 조사로 파악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수는 14만8961명이다. 매년 산재 희생 노동자가 일제강점기 전체 강제징용 피해 노동자 수의 70%에 육박한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인 오민규는 최근 프레시안 기고에서 1999년에 발간된 국제노동기구(ILO)의 기준적용 전문가위원회 결말을 소개한다. “이렇게 비참한 조건에서 일본의 민간기업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 징집이 벌어진 것은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일본 오사카 특수영어교사노조가 1995년 ILO에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를 진정해 나온 결론이다. 오민규는 이 연대를 전하며 “국제사회에서 한국 정부의 정당성을 굳건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도 강제노동 금지협약을 비롯한 ILO 핵심협약을 즉각 비준”하라고 말한다. 일본 도로지바 국제연대위원회는 ‘개헌-전쟁을 향한 아베 정권 타도! 대한국 수출제한을 즉시 철회하라!’에서 “노조 존재 그 자체를 근절하려는 공격이 국가주의-배외주의를 부추기는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며 아베 정권의 노동 탄압을 전했다.

민족이 실재하는 것인지, 상상의 산물인지는 알 수 없다. 애국이나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보편의 가치를 뒷전으로 밀쳐내 위험하다는 건 분명하다. 난세니 토착왜구니 오랑캐니 하는 말의 범람 속에 부쩍 잦아진 ‘우리’란 말도 톺아봐야 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고, 힘세며, 용감하고 재능 있다”는 말을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나’ 대신 ‘우리’를 대입하면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갈채한다. 그 말을 한 이를 애국자라 부른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한 스님의 이 같은 말을 전하며 “이런 난센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수록 평화에 대한 위협은 커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를 제외한 이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는 점을 경고했다.

‘국민’이든 ‘민족’이든 ‘우리’를 앞세우는 세상은 위험하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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